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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나라는 존재

기자명 김용규

세상 풍파에도 주인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요즘은 한 달에 두어 번 서울에 올라갑니다. 강연을 위한 일정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서울로 대학생활을 떠난 외동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복잡해 차를 가져가기 보다는 오송역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을 주로 택합니다. 오송역에서 KTX를 타면 40분 남짓한 시간 만에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나는 서울이 불편해서 괴산으로 떠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서울로 들어서는 관문에서 나는 늘 호흡을 가다듬고 걸음을 놓습니다. 이런 습관은 아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나서야 서울에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역에 내리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향해 걸음을 놓습니다.

각자에 내재해있는 ‘나’라는 씨앗
접힌 씨앗  펼치는 것이 인생 임무

그리고 거의 항상 어떤 분을 스쳐 지나가게 됩니다. ‘불신지옥 예수천국!’ 자신의 몸통보다 큰 푯말에 저 글씨를 붉게 써서 몸의 앞뒤로 두른 사람, 무심하게 오가는 행인들을 향해 자신의 그 신념을 간절하게 외쳐대는 분 말입니다. 그분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다면 신은 무엇으로 인간을 심판하실까? 그분의 주장대로 그것이 단순히 특정한 존재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따라 판별되는 것일까?

어제는 어느 교육연수원에서 강의를 하던 중 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정원 벤치에 앉아 물들어가는 가을의 멋진 풍광을 감탄과 함께 홀로 즐겼습니다. ‘장엄하구나! 눈부시구나! 아, 저 가을 참 아깝구나!!’ 그러다가 지는 햇살을 받아 실루엣마저도 반짝이는 ‘강아지풀’ 한 포기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여느 강아지풀과 녀석은 무척 달랐습니다. 강아지풀은 대략 허벅지에서 무릎 높이까지 제 키를 키우며 가늘고, 긴 꽃대를 만들어 제 꽃을 피워 꽃모양 그대로 열매를 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원에서 만난 그 녀석과 주변의 강아지풀들은 모두 대략 20cm 남짓했습니다. 저들은 왜 키가 작은 것일까? 나는 그 까닭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미소를 지었습니다.

씨앗이 거의 다 여문 그 강아지풀 한 포기를 조심스레 뽑아 강의장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연수중인 선생님들에게 이런 화두를 먼저 던졌습니다. “거리에서 불신지옥의 푯말과 간절한 외침을 들어보신 분들 많지요? 신은 정말 그것으로 지옥행과 천국행을 결정하실까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강아지풀을 들어 보이며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풀을 뽑는 일을 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풀 한 포기에도 그의 생애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풀을 뽑는 일이 내게는 늘 미안한 일이거든요. 하지만 오늘 교육 목적을 위해 씨앗이 거의 다 여문 이 녀석을 뽑아 왔습니다. 다른 강아지풀과 달리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일까요?” 이런저런 대답들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타당한 대답은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나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믿음 여부만을 가지고 지옥과 천국행을 가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은 자신의 뜻을 따랐는가, 따르지 않았는가에 의해 그 길을 판별하리라 나는 믿습니다. 강아지풀의 씨앗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고, 도토리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의아해 하는 표정을 향해 말을 이었습니다. “도토리 안에는 참나무가 접혀 있고, 강아지풀 씨앗 안에는 강아지풀꽃이 접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저마다에게는 무엇이 접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라는 씨앗 안에는 내가 접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신의 조화라 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신은 삶을 다한 존재를 향해 무어라 물을 까요? 이렇게 묻지 않을까요? ‘너는 너로 살았느냐?’ 너를 시험하는 갖은 풍파 앞에서 너는 어떠했느냐? 저 강아지풀이 정원 관리사의 낫질에 잘려나가 키우던 키를 잃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제 꽃을 피웠듯이 너도 그 풍파를 보듬고 끝내 너로 살았느냐? 아니면 무릎 꿇어 타자로 살다가 온 것이냐?”

어떻게 생각하세요? 붓다께서도 모든 존재 안에 불성이 접혀 있다했습니다. 믿음 여부보다 중한 것, 바로 누군가 모든 씨앗 속에 접어 넣어준 제 씨앗을 그 모습대로 펼쳤느냐, 아니냐로 판결하지 않을까요?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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