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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깨달음을 얻는 방편문

기자명 조정육

“나는 누구인가? 불성을 가진 부처입니다”

▲ 박능생, ‘반포동’(부분), 212×148cm, 한지에 혼합재료, 2016~2017년. 질문이 있는 곳에 해답이 있다. 해답은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서 물러서지 않고 해답을 찾다보면 바로 그곳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생로병사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불국토다.

사람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공부 방법도 다양하고 공부 기간도 다양하다. 내가 불교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왜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사무치게 궁금했다. 해답을 찾으면 중생교화를 하겠다는 거창한 목적이나 철학적인 허세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나의 생로병사가 궁금했을 뿐이다. 아주 개인적이고 아주 소극적인 궁금증이었지만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고 싶은 절실한 의문이었다. 물론 이런 삶의 법칙은 나에게만 적용된 문제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주변사람들의 사는 모습 또한 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결국 태어나서 죽는 것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사유
허공같은 마음이 곧 삼라만상
우리 생명이 곧 아미타부처님

그런데 생로병사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후세계였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귀신이 되는 것일까. 먼지로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영생하는 것일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정말 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무엇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책을 읽고 선지식이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여러가지 수행을 했다. 공부하는 과정은 희열과 절망이 교차했다. 공부가 진척될수록 여러 선지식들이 얘기한 경지에 진입했고 곧 정상에 도달할 것 같은 희열감이 차올랐다. 수많은 의문의 빗장이 풀리면서 머지않아 나도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공부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엽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일 뿐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답은 얻지 못했다. 그것이 나를 더 조바심나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해답은 꼭 신기루 같았다. 실재하는 것 같아 다가가보면 결코 실재하지 않은 것이 신기루다. 마지막 문을 밀치지 못하니 그 문 앞에서 한없이 절망했다. 정말 해답은 없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특정한 사람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일까. 의구심과 자괴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생사해탈에 대한 정확한 견해나 증오(證悟)가 없이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허송세월만 할 뿐 나의 삶이 아니었다. 마지막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번개처럼 깨닫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그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석가모니부처님이었다. 부처님도 사람의 몸으로 해답을 찾지 않았는가. 다만 시간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부처님처럼 영민하신 분도 해답을 찾기 위해 6년 동안이나 고행을 하셨는데 나같이 아둔한 사람은 그 두 배 세 배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조금 늦더라도 해답만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책속에서 만난 선지식들의 행적도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깨달음을 얻어 고불(古佛)로 칭송받는 선지식들의 오도(悟道)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불성을 가진 본래 부처라는 것이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가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은, 부처님처럼 뛰어난 분이 아니라도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들 중에는 부처님처럼 머리가 좋고 뛰어난 분도 있었지만 주리반특처럼 경전 한 구절도 외우기 힘들었던 둔한 분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부처님처럼 마지막 문을 밀칠 수 있지 않을까.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기다리듯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화두를 참구하면 번개처럼 번쩍이는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논리는 맞지만 속세에 살면서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기다리듯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내게도 불꽃처럼 환한 빛이 터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몇 십 년 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답이 어느 한 순간에 이해된 것이다. 그것은 금타(金陀, 1898~1948)화상이 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찾아왔다. ‘보리방편문’은 깨달음을 얻는 방편문이라는 뜻으로 금타화상이, 용수(龍樹)보살이 저술한 보리심론(菩提心論)에서 공부하는 요령을 간추린 문장이다. 한자가 뒤섞인 ‘보리방편문’은 청화(淸華, 1924~2003)선사가 한글로 풀이를 해 놓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보리방편문’을 몇 년 동안 사경(寫經)하고 외우면서 뜻을 되새기다보니 어느 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즉 허공같은 마음이 곧 삼라만상이고 아미타불의 일대행상(一大行相)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음은 그 작용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원만보신 노사나불과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로 부를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불(三身佛)이고 우리가 생멸을 겪는 모든 과정조차 결국 아미타불의 일대행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바뀌고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의미에서 생멸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적멸(寂滅)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마음 즉 아미타불의 일대행상은 디팩 초프라가 ‘우주 리듬을 타라’에서 말한 우리 존재의 근본바탕이고 전체 우주의 장(場)인 ‘통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통일장 즉 순수 의식의 장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전체 우주를 만든 같은 지능의 장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땅과 하늘, 식물과 동물, 해와 달의 모든 세계가 특정한 주파수로 이루어지는 특정한 의식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주의 한 부분이고 우리 몸의 생체 리듬은 전체 우주와 연관된 지구 리듬의 한 표현이다. 즉 삼라만상을 비롯한 우주와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바다와 물거품이 한 몸이듯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삼라만상이다. 불이(不二)다. 우리의 생명이 곧 아미타불의 일대행상이니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고 찬탄하신 내용 즉 우리 모두가 불성을 가진 본래 부처라는 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야 겨우 해답을 찾았다. 앞으로는 그 해답이 완전히 나의 것이 될 때까지 보임(保任)하는 것이 중요하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다. 포기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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