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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술은 익은 바가 없다

변화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자기가 불토를 장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씨앗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무가 갑자기 온 것은 아냐
결코 같지도 다르지도 않아

가는 현상이 있을 뿐 가는 자는 없다. 감(go)은 연속선상에 있으나 불변의 주체는 없다. 그러므로 중생을 구하거나 불토를 장엄하는 자는 없다. 그런 현상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주어와 목적어로 이루어진다. 주어와 목적어가 없으면 언어가 무너진다. 무아연기는 주어와 목적어가 사라진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주어와 목적어로 이루어진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 변하기 전의 나와 변한 후의 나는 다른 존재이므로, 내가 A에서 B로 변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변화의 주체가 없고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현상의 주체가 없고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술이 익어간다’할 때, 익기 전과 익은 후를 관통해 흐르는 술이라는 (불변의) 주체는 없다. 관습적으로 실용적으로 ‘술’이라는 주어를 쓸 뿐이다. '나무가 씨에서 움텄다’고 할 때, 씨 속에 나무는 없다. 그 조그만 씨앗 속에 어떻게 그렇게 큰 나무가 들어갈 수 있나? 씨앗 안에 DNA가 들어있고 이게 거대한 나무를 만든다. 그래서 씨앗 안에 나무가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DNA와 유전자의 존재를 몰랐기에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백내장 환자가 무지개를 보는 것처럼 힘들었다.

용수는 ‘중관(中觀)’에서 무아연기를 8불중도(八不中道)로 설명한다. 소위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거·불래(不去不來) 불일·불이(不一不二) 불단·불상(不斷不常)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또 이어질 듯 끊어지는, 외견상 일견 모순되는 현상의 생멸(生滅)을 묘사한 표현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변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용수는 8불중도를 씨앗과 나무의 연기관계로 설명한다. 씨앗이 죽고 나무가 태어나는 게 아니다. 씨앗과 나무는 연속적으로 변하는 변화의 양 끝을 나타낼 뿐이지, 씨앗이라는 ’분리된 독립적인 불변의 실체‘와 나무라는 ’분리된 독립적인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씨앗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무가 어디선가 온 게 아니다. 연속적인 변화의 결과이다. 씨앗과 나무는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씨앗은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씨앗으로 남아있지만, 인연을 만나면 씨앗으로만 남아있지 않고 나무로 변하기도 한다.

수정란과 성체의 관계도 팔불중도이다. 수정란이 사라지고 성체가 생긴 것이 아니다. 수정란이 어디론가 가고 성체가 어디선가 온 것이 아니다. 수정란은 성체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수정란은 없어졌지만 성체가 생겼으므로, 단멸이 아닌 것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다.

만약 용수보살이 1900년 전에 난자·정자·수정란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팔불중도의 예로, 씨앗과 나무의 관계 대신에 수정란과 성체의 관계를 들었을 것이다. 가장 고귀한 인간을 예로 드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불교는 그 주요 관심이 외부세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의 발전은 불교의 근본교리를, 현미경으로 보듯 눈이 안 좋은 사람도 누구나 볼 수 있게, 확대해 보여준다.

몸이 죽고 마음이 떠나고, 새 몸에 헌 마음이 들어온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이 사라진다. 언어중추인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 사라지면 말을 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해마가 사라지면 장기기억 생성능력이 사라지며, 변연계가 사라지면 감정이 사라진다. 마음은 몸과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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