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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부처와 중생, 모두 얻을 것이 없다

기자명 정운 스님

부처·중생은 스스로 지은 헛된 견해

원문: 배휴가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십니까?” 황벽이 말했다. “실로 여래는 중생을 제도한 적이 없다.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비아(非我)를 어찌 얻으려는가?’ 부처와 중생 모두 다 얻을 것이 없다.” 배휴가 물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나타내었고, 중생제도를 하였거늘 어찌하여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경전에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을 신체적 특징 아닌 것으로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부처와 중생은 다 그대가 지은 헛된 견해이다. 다만 본심을 알지 못하므로 부질없는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면 문득 부처라는 장애를 입고, 중생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면 중생이라는 장애를 입는다. 또한 범부라고 하는 것이나 성인이라고 하는 것, 깨끗하고 더럽다는 등의 견해는 모두 장애이다. 그대 마음에 장애가 있으므로 계속 (번뇌의)굴림을 받는다.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가 반복하듯이 쉴 기약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는 얻고 중생 버릴 것 아냐
버리고 취함에 집착하면 번뇌
마음장애로 번뇌 굴림 받는 건
피동적으로 번뇌에 이끌린 삶

해설: 원문에서 ‘실로 여래는 중생을 제도한 적이 없다’는 내용은 ‘금강경’ 25품에 출처를 둔다. “실로 한 중생도 여래가 제도하지 않았다. 만약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면, 여래는 아·인·중생·수자상이 있는 것이다.” 즉,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면 자신이 제도했다는 관념과 집착에 빠져 있음을 내포한다. 곧 상을 여읜 경지의 부처가 참 부처임을 시사한다. 또 ‘금강경’ 3품에서는 “실로 한 중생도 멸도시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어록 내용으로 보면 상을 여읜 무심을 말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중생은 본래 중생이 아니라 깨달아 있는 부처인데, 굳이 ‘부처’라는 중생에게 제도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미다. ‘능가경’에서도 부처님은 “나는 어느 날 밤 정각을 얻은 날부터 반열반에 들 때까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49년 동안 설법한 것이 언어와 문자를 빌려 깨달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언급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육조 혜능의 말대로 일체중생이 ‘바로 성불해 마친 상태[直了成佛]’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비아를 어찌 얻으려는가?’라는 말은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에서 나왔다. ‘유마경’에서는 “아와 무아가 둘인데, 아도 오히려 얻지 못했는데, 어찌 비아를 가히 얻으려는가? 아의 참다운 실상을 관하면,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형태[色]의 성품을 꿰뚫어보면, 색의 성품 그대로가 공이듯이, 색이 곧 공인 것이다. 그래서 열반 세계는 좋은 것이니 취해야 하고, 세간은 번뇌이니 싫다고 버릴 것이 아니다. 또한 부처 경지는 꼭 얻어야 하고, 중생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것에 집착하면 번뇌이니,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 다음에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는 ‘금강경’ 5품에서 볼 수 있다. 이 게송은 ‘금강경’의 대표적인 4구게요, 무상계(無相戒)라고 한다. 여래는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모습이고, 생사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경계인 멸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형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은 육안이 아닌 법안(法眼)으로 볼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장애가 있으므로 계속 (번뇌의)굴림을 받는다’는 말은 자신의 참된 주체 속에서 보지 못하고, 늘 피동적으로 번뇌에 이끌려 가는 것을 뜻한다. 어록이나 경전에서는 번뇌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원숭이에 비유한다. 이를 ‘유교경’에서는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산란한 마음을 원숭이와 같다’고 표현했고, ‘유마경’의 ‘향적불품’에서는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을 원숭이에 비유했다. 또 조삼모사(朝三暮四) 고사에서는 원숭이를 어리석은 존재로 표현하고, 원후착월(猿猴捉月) 고사는 우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분수에 맞지 않는 야망으로 스스로 파멸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이다. 그 축생을 산란심이나 욕심쟁이,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는 것 또한 인간의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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