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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

기자명 조정육

견성은 신통이 아니라 생사해탈에 있다

▲ 김원근, ‘덕구, 프로포즈’, 45×32×73cm, 50×33×62cm 레진 에폭시에 아크릴 채색, 2015년. 사람들은 흔히 사람살이를 구분하려는 욕망을 갖고 산다.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으로 구분하려는 욕망이다. 자신보다 격이 떨어진 사람을 보면 삼류인생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 모두는 불성을 지닌 부처다. 다만 몸이라고 하는 형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깨달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깨달음을 얻으면 뭔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거나 남들에게는 없는 초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그 대상이 불보살이거나 귀신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영체라도 상관없이 그런 분들을 볼 수 있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 원인으로는 TV나 영화 등의 영상매체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고승들의 행적을 담은 서적에서 그분들의 신이한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폐해 때문이기도 하다.

정견이 없는 신비한 능력은
아이들 손안의 칼처럼 위험
만물과 나 하나라는 깨달음
머리 열리는 경험보다 중요

전화도 없는 첩첩산중의 암자에서 뛰어난 도력을 지닌 스님이 오늘은 세 사람분의 점심을 더 준비하라고 시킨다. 그러면 틀림없이 점심 때 세 사람의 손님이 찾아온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다. 지리산에 살고 있는 스님이 세숫대야의 물을 허공으로 뿌렸다. 그런데 가야산에서 난 산불이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모두 꺼졌다.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린 스님의 이야기다. 오대산에 살고 있는 스님이 냇가에서 참선을 하는데 자꾸 시커먼 동물이 등을 떠밀어내서 암자로 올라갔다. 잠시 후에 엄청난 폭우가 내려 냇물이 범람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장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과거에 살았거나 생존해있는 수행자들의 이런 이야기들은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한 신비로움을 갖게 한다. 문제는 이런 신비로움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수행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신통력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한다. 

지난 번 글을 읽은 어떤 독자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견성(見性)에 대한 내용이었다. 깨달음은 정수리가 열리고 번개가 몸을 관통하는 것이고 몸이 없어지면서 아미타불의 에너지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정수리가 열리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보리방편문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얻었다면 정수리가 열리고 번개가 관통한 것 같은 신체적인 변화를 경험했냐는 질문이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굳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의외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견성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됨’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견성을 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는 것으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유체이탈을 하거나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며 도술을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수행을 하겠다는 사람 중 일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의 견해를 들여다보면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면서 도교와 신선사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신선들의 존재는 육체의 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신비스럽고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내단(內丹) 수련을 하거나 호로병속에 넣어 둔 단약(丹藥) 한 알만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끝없이 전해지면서 질병 없이 사는 것과 동시에 귀신을 부리고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삼명육통이 아니라 그저 수행의 과정일 뿐이다.

부처님 시절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은 물론 삼명육통을 한 수행자들이 의외로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통력의 사용을 금지하셨다. 수행자가 신통력을 보여주면 불법을 더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사해탈에 관한 문제였다. 사람이 왜 태어나서 살다 죽는가.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정수리가 열리는 경험을 한 적도 없고 번개가 몸을 관통한 것 같은 찌릿함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또한 그 분야에 관심도 없다. 내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귀신을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한들 그게 나의 생사해탈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능력을 가진 것에 불과한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도 죽음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절로 알아질 때가 있다. 그런 능력도 별것 아니다. 관심 있으면 알게 된다. 타심통이나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은 불자가 아닌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도달할 수 있다. 개발을 하지 않았을 뿐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견(正見)이 바로 서지 않은 사람이 그런 능력을 발휘했을 때는 폐해가 더 크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으로 칼을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보리방편문을 통해 환희심을 맛보았던 이유는 법신 보신 화신의 관계, 그리고 아미타불과 나와의 관계, 삼라만상과 나와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수학공식처럼 이해가 되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청정법신비로자나불과 한 몸이다. 그 몸이 원만보신노사나불의 작용을 받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된다. 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의 범위는 광대하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다.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無色衆生)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無情衆生)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有情衆生) 등의 모든 중생들’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의 화신이다. 이 공식을 알고 나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도 나와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꿈틀거리는 벌레와 곤충과 닭과 돼지도 나와 같은 불성을 지닌 중생이다.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의 삼라만상이 모두 중생이다.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까지도 중생이다. 어마어마한 논리다. 이로써 삼라만상과 우주전체가 불법 아닌 것이 없게 된다. 법신 보신 화신과 중생과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다. 부처가 바다라면 중생은 파도다. 바다와 파도는 한 몸이면서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바다와 파도의 작용은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모습 즉 일대행상(一大行相)이다. 그러니 나와 아미타불은 한 몸이다.

그 깨달음이 내게는 정수리가 열리는 경험보다, 번개가 몸을 관통한 것 같은 찌릿함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읽는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뛰는 깨달음이었다. 수행하는 모든 분들이 한번쯤 가 닿았으면 하는 환희로움의 세계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4호 / 2017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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