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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기자명 금해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7.11.14 14:53
  • 수정 2017.11.16 16:29
  • 댓글 0

자연은 있는 그대로 행복 조건
본래자리 찾으면 세상 편안해져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場舌)
계곡 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산 빛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한 밤에 팔만사천 게송을 들으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다른 이에게 어떻게 일러 줄 것인가.

소동파가 폭포수 소리를 듣고 지은 시가 절로 떠오르는 계절입니다. 나뭇잎 하나하나 물들어 찬란히 빛나고, 흔들리는 바람결 따라 어디든지 둘러보아도 눈부신 가을빛이 나를 따라다니며 반깁니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선사들의 기행이 이해되는 시절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무작정 만행을 떠났습니다. 발끝에 닿는 낙엽 소리에도 웃음 짓고, 햇빛에 자기 색을 드러내는 나뭇잎, 그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 하나에도 시선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등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자작나무를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오래도록 숲길을 걸었습니다. 겨울 맞으러 가며 모든 옷을 버리고 홀로 선 나무들이 참으로 자유롭고 홀가분해 보여서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연을 볼 때, 나의 말과 생각의 분주함이 쓸데없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옷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속속들이 봅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미고, 멋진 말, 특별한 선물이나 여러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또 권력이나 돈, 명예가 자신과 가족, 또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충족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 절에 10년 정도 다니고 있는 어느 보살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우리 절에 처음 왔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7일 묵언수행정진 기간이었습니다.

“스님께서 처음 온 우리 부부에게 말없이 차를 주셨습니다. 그때, 여러 보살님들이 같이 있었는데, 그 분들이 모두 그냥 차만 마셨어요. 다들 너무 편해 보였지요. 그 날 마신 차 맛과 스님의 미소, 가끔 들렸던 풍경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처음 만났으면서도 편안하고, 한마디 말없이도 행복했던 날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나의 부족함이 비어있는 자리에서 충족되어지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저 마주보고 있음으로도 충분했지요.

꽃들과 나무들, 세상에 펼쳐져있는 모든 자연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이기에 자신과 대상이 모두 편안한 것이며, 스스로 비어있기에 더 아름다울 겁니다. 청정하고 맑은 본래의 자리를 찾는 것은 결국 나와 대상을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 노보살님이 눈물범벅이 되어 절에 올라왔습니다. 너무 울고 있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며 눈물을 받아줄 뿐이었습니다. 눈물이 그치자 보살님은 거사님과 한바탕 싸웠다며 “스님이 계셔서 참 좋습니다”라며 미소 지었습니다. 그 미소가 제게도 기쁨을 주었지요.

▲ 금해 스님

 

우리는 매일매일 나를 완성하기 위해,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어 사랑하는 상대를 원망하고 자신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숱한 생명들처럼, 나도 세상의 찬란함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세상과 하나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미소만으로도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당신은,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금해 스님 서울 관음선원 주지 okbuddha@daum.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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