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병고를 친구로 삼다 ④
86. 병고를 친구로 삼다 ④
  •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 승인 2017.11.2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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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나빠지면 눈의 소중함 깨닫듯 항상 지극해야 합니다”

▲ 수해 현장에서 이재민들에게 도시락을 보급하고 있는 불광산의 비구니스님들. 대만 불광산 제공

"비록 빈승이 나이가 들어 신체적인 기능은 줄곧 떨어지고 있지만 결코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빈승 스스로 귀인이 되고자 정진하고 배워나갈 뿐입니다."

첫 번째 밤의 휴양을 거치고 나서 저의 회복정황은 아주 좋아졌고 그 다음날 저는 일반병동으로 보내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제가 어떻게 조심하고 어떻게 재활회복을 해야 하는지와 넘어지면 안 되는 것 등등의 주의사항을 일러주었습니다. 둘째 날이 되어 주변에 아무도 없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당부도 있었기에 무료하기도 해서 침대에서 내려와 이곳저곳으로 걸어 다니면서 병원 건축을 관찰하였습니다. 나중에 간호사들이 사방으로 저를 찾아다녔는데 간곳을 알 수 없어서 매우 놀랐다고 들었습니다. 의사들도 긴장하여 이렇게 빨리 일어나서 걸어 다니면 안 된다며 저를 야단쳤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몸이 이미 회복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날은 마침 불광산 총림학원이 ‘범패공연 : 시방세계 부처님을 예찬하는 범음악무(梵音樂舞)’를 타이베이 국가극장에서 공연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불교음악이 국가급 전당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로, 제 자신이 필히 관람을 해 모두의 사기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의료팀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기에 저는 집도의인 ‘장연’ 선생을 설득하였는데 기꺼이 저와 함께 공연장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병원의 원장부터 의료인원 십여 명이 저와 함께 범패공연을 관람하면서 저는 매우 큰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퇴원 이후 빈승은 감사함을 표하고자 저의 의료 담당자들을 타이베이 도량으로 초청하였고 가족들도 함께 오도록 하였습니다. 본래는 20여명 정도 접대하는 자리였는데 실제로는 20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오게 되면서 주방 사람들이 음식을 급히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날 장중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 원장, 부원장, 주임, 의사, 간호사와 그들의 가족들 모두는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빈승이 병을 친구로 삼은 가장 좋은 기록일 것입니다.

나중에 장연 선생이 운동을 해도 된다고 하기에 저는 선생에게 “함께 캐나다에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로키산맥이 있는데 오래 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다며 같이 가달라고 청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연 선생은 매우 기뻐하며 수행해서 저를 돌봐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정에 7~8명이 동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모두들 일주일간 미주서부지역을 둘러보았습니다. 빈승은 병을 친구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의료진들은 병으로 인해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심장 수술로 인한 입원으로 저는 병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낸 경우가 되었으며 저는 마치 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처럼 모든 의료진들이 하는 말과 보건지식에 협조하고 배우고자 노력하면서 자신이 환자라는 현실을 거의 잊고 지냈습니다.

그 이후로 연이어 몸에 일련의 증상이 생기게 되면서 거의 매년마다 몇 번씩 병원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1998년 10월에는 당뇨로 인한 혈관경화합병증으로 심장이 영향을 받게 되었고 저의 두 다리도 영향을 받게 되면서 걷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신도 ‘조원수(趙元修)’ 부부의 건의로 미국 휴스턴의료센터에서 80여세 고령의 ‘닥터 드베키’가 막힌 경동맥혈관을 뚫는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의사의 엄중한 당부로 수술 후 일주일간 저는 호주 골드코스트 불광연센터에서 무문관 휴양을 하였습니다.

출가자로 하루를 살더라도 그 하루 동안에는 출가자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빈승이기에 무문관을 하면서도 수행한 사서들을 이끌고 ‘불광 교과서’의 저술과 편집을 했습니다. 비록 신체적으로 행동에 불편함이 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불법을 설할 수 있으니 한마음 한뜻으로 사서들을 지도하여 이 한 질의 책이 출판되어 불교도들이 불법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가 만들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뇨를 오랫동안 앓게 되니 눈도 영향을 받아 시력이 흐려지고 오른손도 떨리게 되었기에 대략 20년전 타이베이에서 눈에 레이저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시 저의 두 눈을 오래된 기계로 300여번이나 쏘는 치료를 하였는데 좋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되었습니다. 홍법활동을 하려고 미국을 자주 다녔기에 LA에서 개원하고 있는 유명 안과전문의 ‘라가(羅嘉)’ 선생으로부터 받은 레이저 치료는 일이백 번의 레이저 치료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심한 치료를 받은 뒤 저는 눈을 지켜낼 수 있었고 안경으로 교정을 해서 억지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1999년 73세의 빈승은 시력을 점차 잃으면서 국내 안과 권위자인 ‘문량언(文良彦)’ 선생에게서 진료를 받았는데 “의료계에서 일을 한지 20여년이 넘었지만 당뇨병 환자가 레이저 치료를 여러 번 받고서도 스님처럼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나 봅니다”라고 신기해했습니다. 이런 찬탄의 말을 들으니 빈승도 약간의 위로를 느꼈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있을 때 눈에서 다시 출혈이 있어서 현지에서 다시 라가 선생으로부터 두 눈을 진료하면서 레이저로 지혈을 했습니다. 라가 선생은 “병이 난 눈은 마치 낡고 구멍이 난 옷과도 같아 뚫어진 곳을 꿰매더라도 다시 떨어질 뿐이지 좋아질 수는 없다”고 솔직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두 눈을 위해서 중국 국가종교국 ‘엽소문’ 국장은 제가 북경에서 진료를 받도록 관심을 가져주었으며 많은 원로의사들도 저에게 많은 의료적인 의견을 주었습니다. 또한 마이애미에 사는 한 불자는 의료기기를 특별히 대만으로 옮겨와 제가 치료받도록 하였는데 그 신도는 제 눈을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LA의 ‘심인달(沈仁達)’ 선생은 당뇨병은 좋아질 수 없는 것으로, 이미 하얗게 희어버린 머리카락이 어떻게 다시 검은 머리칼이 될 수 있겠느냐며 같은 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 말은 저의 당뇨합병증으로 병이 든 이 두 눈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빈승도 눈에 대해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눈의 퇴화가 아주 빨라지고 더구나 눈 밑의 석회화로 인해 몇 년 전부터는 빈승 앞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사람의 오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볼 수 없습니다. 책을 볼 수도 없고 신문도 볼 수 없는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그러다가 갑자기 붓글씨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마음 속으로 요량을 하고 종이에 붓을 한 번 대면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쓰는 것으로, 중간에 멈추게 되면 두 번째 획을 어디에 이어서 써야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또한 빈승이 병과 친구를 하면서 별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신체적인 기능은 줄곧 떨어지고 있지만 빈승은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서 언제나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면서 스스로 귀인이 되고자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2003년 3월, 빈승은 담결석 염증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으로 한 밤중에 가오슝 ‘영민총의원’ 응급실에 입원하였는데 높아진 혈압이 떨어지지 않아 의료진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타이베이 ‘영민총병원’으로 옮겨 뢰영요(雷永耀) 부원장의 집도로 담낭 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매년 연말에 호법불자들에게 편지를 썼었는데 그 해에는 “이로써 저는 ‘담’이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비록 살날이 많지는 않겠지만 이 복잡한 인간세상에서는 역시 담이 작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편지를 썼었던 기억이 납니다.

2004년 저의 이 주름살 가득한 백발의 몸에 시력은 예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8월 미국에서 홍법 교화하던 중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라가 선생은 저를 위해 인공수정체 삽입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2006년 4월 초 실수로 넘어져서 갈비뼈 세 군데가 부러졌습니다. 비록 고령의 몸이지만 숨만 쉬어도 아픈 상처를 참고 예정된 일정대로 제1차 세계불교포럼의 초청을 받아 중국 항주로 가서 ‘조화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두 시간 동안 강연을 하였습니다.

빈승의 고집에 곁에 있는 제자들은 걱정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강연으로 중국 본토와 대만의 왕래를 촉진하고 미래에 불교와 문화, 종족의 조화로움과 공동발전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기여하고자 조금도 주저함 없이 참석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저는 인도 하이데라바드(Hyderabad)시로 날아가 삼귀의 수계법회를 거행하여야 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저의 주치의 강지환 선생이 함께 동행했습니다. 저는 부정맥과 심부전의 우려가 있는 몸으로, 암베드카르 박사(Ambedkar,  1891~1956)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였고 또한 20만명이 수계를 받은 삼귀의계 수계식을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4월 저는 다시 순간적인 실수로 손목에 골절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옛말에 “근육을 다치고 골절을 입으면 백일을 간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장경(長庚)병원 정형외과 ‘곽계양(郭繼揚)’ 선생과 재활학과 ‘오의화(吳宜華)’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서 손을 고정시키고 3개월은 빈승으로 하여금 어떻게 한 손으로 생활하는가를 배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독특한 삶의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빈승은 자주 어지러워서 자연히 넘어지게 되었기에 자조하듯이 나는 넘어져본 경험이 많아서 어떻게 넘어져야 크게 다치지 않는지 알고 있다며 제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렇듯 조금 큰 문제와 함께 작은 문제들도 없지는 않았기에 어떤 의사를 소개하거나 어떤 민간요법을 소개해 주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유명한 한의사가 대만 남부에 있는데 매일 진맥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진찰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한의사는 빈승과 특별한 연분이 있어서 자주 불광산에 와서 빈승을 치료해 주려고 하였지만 저는 매번 사양하였습니다. 10세에 빈승에게 삼귀의계 수계를 받은 호수경(胡秀卿 : 의사이자 방송국 사회자 출신으로 30년 넘게 성운대사 강연회의 사회를 맡음. 역자 주) 여사는 대만여성한의사협회 이사장으로, 어려서부터 불심이 돈독하여 제가 포교에 열심인 것을 보고 자발적으로 저의 수행간호사가 되겠다고 하였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에서 호의를 거절하였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16호 / 2017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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