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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공부하기 좋은 때

기자명 조정육

“지금 이 시간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 고찬규, ‘드라마-장밋빛 인생’, 200×80cm, 한지에 과슈, 2010년 1)아무런 고난도 겪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다.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손쉽게 부와 명예를 움켜쥐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단지 드라마일 뿐이다. 혹은 거짓말이거나 사기다. 허상에 속아 속상해할 필요 없다. 오직 땀 흘리며 노력한 것만이 나의 것이다.

요즘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의사, 정치인, 재벌 그리고, 판사와 변호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든 드라마가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드라마가 그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한다. 특히 판사나 변호사, 검사가 얽힌 이야기는 드라마의 단골 메뉴다.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점에서 사건은 발생하고 사건이 있어야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법조인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 모른다. 시청자는 검사나 변호사가 등장해 오리무중에 빠진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답답한 현실을 그렇게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것이리라.

사람들은 빼어난 사람들 보면서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경우 많아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 배움 혹은
막힘 통해 깨우치는 경우에 해당

자만심 자괴감 모두 경계하면서
묵묵히 자신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일

얼마 전 법조계에서 근무하는 분과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많이 놀랐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예상 외로 소박하고 겸손했기 때문이다. TV나 영화에서 봤던 권위적이고 거드름피우는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그 신분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다 보니 나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거의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의를 하고 글을 쓰는데도 여전히 그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말을 했다. 이 정도 세월을 한 분야에 전념했으면 강의나 글쓰기가 쉬워져야 하는데 가면 갈수록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현상을 겪으면서 내가 조금 모자라거나 이 분야에 재능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50대 중반을 넘은 나이가 되어서도 재능 운운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분야의 전문가를 만난 김에 똑 부러지게 감정 정리하는 비법을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얘기를 듣고 난 그 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웃었다. 내가 지금까지 책을 여러 권 썼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글을 쓰는 줄 알았다고 했다. 솔직히 지금의 나는 습작시절에 했던 글쓰기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TV에 나온 문필가가 원고지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글을 쓰는 모습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다. 나는 아무리 쉬운 글이라도 수없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나의 글은 거의 누더기에 가까울 정도로 깊고 꿰매고 잘라낸 후에야 마무리된다. 이것이 과연 전문가의 모습일까? 한참 서투르고 어리숙한 초짜에 불과한 것이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완벽하게 공부가 깊어지지도 않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또 나의 해석까지 덧붙인다는 것이 때로는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두렵다. 매번 성현의 가르침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불쑬불쑥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구를 외우는 것보다 단 한 구절이라도 나의 삶 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남에게 보여주는 삶보다 내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삶이 더 중요한 법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 자괴감이다.

이런 고민은 나만 하면서 사는 줄 알았다. 판사나 검사는 법 조항처럼 명료한 삶을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법관은 항상 누군가에게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까 그 중압감이 두 어깨를 짓누른다고 했다. 자신의 판결에 따라 누군가의 삶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 때문에 행여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까 긴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판결은 내려야 하는 것이 법관의 의무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 판결을 내리지만 그 판결이 완벽했는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고 고민한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판결 당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는 법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얘기라서 이번에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드라마를 보면 항상 자신만만하게 판결을 내리던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요. 그랬더니 바로 응답을 했다. “저도 드라마를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부러워요. 배울 수 있다면 배우고 싶어요”라고. “사람살이가 비슷비슷하군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분이 결론을 내리듯 얘기했다. “각자 맡은 일이 다를 뿐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아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나처럼 실수도 하지 않고 회한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물론 타고날 때부터 잘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들이거나 막힘이 있어야 배우는 곤이학지자(困而學之者)들이다. 어느 경우든 배움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질적인 도약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문제다. 공부를 하다보면 혹은 수행을 하다보면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가 많다.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조금 위안이 될 것이다.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저하고 망설인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도 버려야 하지만 자괴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부족한 자신을 믿고 인정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혹은 도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도 어쩌면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다만 그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저 묵묵히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우리 모두는 불성을 지닌 부처라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믿음이 확고하면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큰 절망감이 찾아오더라도 꿈쩍하지 않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까지 지속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 부처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지금은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공부하기 좋은 나이다. 모든 계절과 모든 나이가 전부 그렇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6호 / 2017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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