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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버려라!-상

부서지는 색신이 곧 견고한 법신이다

▲ ‘수타거(隨他去, 겁화에 파괴되어 버린다)’ 고윤숙 화가

불도(佛徒)들은 진리를 찾는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들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 ‘본래면목’이라 불리는 진리를 찾는다. 본래면목에 속하는 진리를 ‘진제(眞諦)’라 하여, 속세에서 말하는 진리인 속제(俗制)와 구별한다. 전자가 제일의제(第一義諦), 즉 일차적인 진리의 세계라면 후자는 이차적인 진리의 세계다. ‘대승기신론’의 말로 바꾸면 진제란 ‘체(體)’에 속한 진리고 본성상 공한 세계에 대한 진리라면, 속제란 ‘상(相)’이 있는 것들이 서로 작용(用)하는 세계, 연기적 세계에 속한 진리다. 어느 세계든 부처가 있지만 본래면목의 세계란 본체에 속하는 견고한 법신(法身)의 세계라면, 우리가 사는 세간은 부처 또한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처럼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응신(應身)의 세계요 색신(色身)의 세계다.

본래면목은 불생불멸할 것이라는 착각
‘공’ 존재한다는 단멸공의 역설과 같아
대천세계 무너지는 것이 변함없는 진리

그런데 이렇게 세계나 진리를 둘로 나누면 그 둘 사이에는 자칫하면 간극과 위계가 생겨나게 된다. 사실 위계는 이미 뚜렷하다. 진제가 제일의제라면 속제는 제이의제인 것이다. 여기에 간극이 더해지면 세계는 이제 둘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양자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는 입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진리를 찾는 이라면 누구도 진리가 확고불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상하며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지만 본래면목이라 할 진제는 그와 달리 확고한 것이기를, 불생불멸의 것이기를 바란다. 덕분에 세간의 진리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진리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일 게다. 지고한 것이란 그렇게 견고하고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불도마저 뛰어넘지 못하는 사유의 지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본체란 자성이 없다는 점에서 ‘공’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했던 용수가 그런 공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을 ‘단멸공(斷滅空)’이라며 비판했던 것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선 또한 본래면목을 말하지만, 그 말에 포함된 ‘문법의 환상’(명언종자!) 때문에 그것이 무상한 세계, 시끄럽고 변덕스런 속세의 세계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잘 안다. 하여 ‘부처’에 대해 묻거나 불법의 대의를 묻는 것을 내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가령 대수법진(大隋法眞)과 위산(?山)의 문답이 그렇다. 대수가 위산 휘하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위산이 말했다.

“그대는 여기 온 지 여러 해 되었지만 전혀 물어보지 않는구나.”
“제가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모르겠다면 무엇이 부처인지 묻도록 하라.”

그러자 대수는 손으로 위산의 입을 막아버렸고, 이에 위산이 말했다.

“그대 이후로도 [그대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린 사람을 내가 만날 수 있을까?”

위산이 부처를 묻도록 하라는 말은 대수를 시험하기 위한 미끼였다. 다들 부처를 묻고 부처를 찾으니 사실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인 셈이다. 그러나 대수는 거꾸로 위산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마 시키는 대로 물었으면 위산에게 한 방 먹었을 것이다. 임제가 목주의 권고대로 황벽에게 물었다가 맞았던 것처럼. 모두 부처를 따로 구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선승들 역시 본래면목을 말하고 부처를 말한다. 무언가를 구하려는 마음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세간을 벗어나 따로 구하면 안된다. 하지만 선사들은 고지식하게 부처와 세간이 하나임을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구하려는 이들이 가는 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놓기를 선호한다. 즉 부처를 구하려면 세간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세간이 바로 부처의 세계고 본체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돌려놓는 반전이 야기하는 당혹을 깨우침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견고한 법신을 묻는 물음에 대룡(大龍)이 한 대답이 그렇다.

“색신은 부서지는데 어떠한 것이 견고한 법신입니까?”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구나.”

물은 스님은 부서지지 않는 견고한 법신에 대해 물었지만, 대룡은 비단결 같은 꽃과 쪽빛 같은 시냇물로 답한다. 이것은 물은 스님이 견고한 법신과 대비했던 바로 그 ‘부서지는 색신’이다. 견고한 법신을 묻는데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 부서지는 색신이 바로 견고한 법신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부서지는 색신을 떠난 견고한 법신은 따로 없으며, 속제를 떠난 진제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부서지지 않는 견고한 법신을 따로 구하려는 것 자체가 도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도는 역으로 그 부서지는 색신을 따라가는 것이다. 대수(大隋)는 이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한다.

“겁화(劫火)가 훨훨 타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모두 무너지는데 ‘이것’도 따라서 무너집니까?”
“무너지느니라.”
“그렇다면 그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를 따라가거라!”

‘이것’이란 겁화의 불로 타는 것과 반대되는 것, 무너지는 대천세계와 대개념을 이루는 것이다. 앞서 대룡의 공안에서 나온 견고한 법신이다. 혹은 본래면목이고, 제일의제인 진제로 표현되는 무엇이다. 그런데 여기서 묻는 스님은 그 ‘이것’도 무너지느냐고 묻는다. 불생불멸의 견고한 법신이라면 무너질 리 없을 터인데…. 대수의 대답은 단호하다. “무너지느니라.” 대룡이 그 변화하고 부서지는 색신의 세계가 비단결 같은 꽃이요 쪽빛처럼 고운 시냇물이라면서 긍정하며 뒤집었다면, 대수는 겁화의 불로 훨훨 타서 무너지는 것을 뒤집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넘긴다. 이에 대해 물었던 스님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았던 것 같다. 따로 견고한 것을 구하지 않고 그 무너지는 것을 따라가겠다고 응수한다. 대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그를 따라 가거라”며 되받는다.

나중에 누군가가, 이 대수의 겁화 얘기에 나오는 스님처럼, 소수산주(紹修山主)에게 물었다.

“겁화가 훨훨 타서 대천세계가 모조리 무너지는데 ‘이것’도 무너집니까?”
“무너지지 않는다.”

대수는 무너진다고 했는데, 소수산주는 반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란 견고한 법신임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물었던 스님은 다시 묻는다.

“왜 무너지지 않습니까?”
“대천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이것’이 무너지지 않음은 그게 대천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견고한 법신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답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이것’이든 ‘법신’이든 대천세계와 다르지 않은 하나다. 대천세계는 원래 무너지는 세계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세계다. 원래 무너지는 세계가 무너진다면, 그건 무너지는 것일까 무너지지 않는 것일까? 무너지는 게 본성인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그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니 그 자신의 본성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따로 무너질 것도 없고 무너질 수도 없다. 무너지는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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