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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보이는 것 너머

기자명 김용규

겨울 흰빛 두려워할 이웃 생각한 적 있나

무당벌레는 어떻게 겨울이 오는 것을 아는 걸까요? 그들은 이미 달포 전부터 겨울을 건널 거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숲 기슭에 흙으로 지어놓은 나의 산방 창문에, 문틈에, 처마 밑에 넘치도록 달라붙어서 방 안으로 들어올 틈을 찾고 있었습니다. 산방 안으로 들어와 나의 빈한한 가재도구 어디 후미진 곳에라도 들러붙어 겨울을 나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지요. 한 여름에 더욱 분주한 개미의 생태 역시 신기합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땅 속에는 기상청 예보 따위는 없을 텐데 어둠 속을 살아가는 그 개미들이 어떻게 큰 비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개미굴 입구에 두둑한 둑을 쌓아 홍수를 막아내는 것일까요? 자신들의 때를 알고 수천 수만리를 찾아오고 떠나가는 철새며 바다생명이며 모두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주할 때마다 우리 인간의 맨 눈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 경지를 저절로 보고 알아채는 힘을 가진 저 자연의 생명 존재들이 참으로 경이롭기만 합니다.

인간은 보지 못하 는것 아는 자연
사람도 보이는 것 너머 볼 수 있어야

어디 다른 생명에게만 있겠습니까? 조물주는 인간에게도 맑은 눈을 주셨습니다. 옛날에는 이 맑은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우거진 숲 사이 오솔길만으로 반도의 삼천리를 걸어서 오갈 수 있었던 눈,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현란한 과학문명의 혜택을 끼고도 그 눈으로 너무 좁고 가깝고 선명한 것들만을 겨우 보고 있습니다. 우리 눈은 퇴행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직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인식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삶은 유감스럽지만 아직 덜 된 인간들 삶의 전형입니다.

어떤 삶이 더 깊고 충만한 삶이겠습니까? 보이는 것만을 보고 추구하고 사는 삶이 그렇겠습니까? 아니면 보이는 것 너머에 담긴 빛나거나 반짝이는 것, 혹은 쓸쓸하거나 서러운 사연을 함께 볼 수 있는 삶이 더 좋은 삶이 되겠습니까? 보이는 꽃이나 열매의 모습이 결코 그 꽃과 열매의 전부일 수 없듯 인간의 진면목 역시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걸친 것들, 소유한 차나 집, 외모 따위가 결코 그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상업광고는 끝없이 그것들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그저 그것은 한 인간의 거죽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더 화려한 거죽을 가져보겠다고 진짜 나를 추구하는 성찰과 행동을 게을리 한다면 그를 어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숲에 겨울이 올 모양입니다. 무당벌레는 달포 전에 알아챈 그것을 나는 요 몇 날의 바람을 느끼며 이제야 겨우 알아챕니다. 바야흐로 숲에는 시간보다 먼저 바람이 겨울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바람은 가벼운 것들을 펄럭이게 하고 가녀린 것들을 뒤흔들며 북방에서 남방으로 거칠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조붓하고 길쭉한 상수리나무 잎들이 철새떼보다 많고 빠르게 날아오르고 회오리치다가 흩어집니다. 이따금 먹구름이 끼고 찬비가 내리던 숲에 드디어 소담한 눈이 짧게 내렸다가 쌓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아직은 대지가 머금고 있는 지열이 저 눈을 삽시간에 녹여내고 있습니다만, 몇 번을 저렇게 내리고 녹는 모습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리는 족족 쌓여 숲의 그늘진 공간부터 흰빛으로 채워나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눈 쌓이기 전에 장작을 더 패둬야 하고 샤워용 온수를 데울 등유를 채워둬야 하고 겨울식량을 비축해야 합니다. 나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한때 와글와글 숲을 채웠다가 슬그머니 잠잠 속으로 들어간 뭇 생명 모두의 사정이 그럴 것입니다. 이제 모두가 겨울을 맞습니다. 불자들에게 겨울은 시인 안도현이 연탄재 그 너머에서 발견하고 우리에게 던진 질문, ‘너에게 묻는다’를 생각하며 나보다 시린 날을 만나고 있을 생명과 이웃을 생각하는 계절이기도 했으면 합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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