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성성역력 밀밀면면 공부하기
42. 성성역력 밀밀면면 공부하기
  • 조정육
  • 승인 2017.11.28 15: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사 너무 집착하지도 게으르지도 말자”

▲ 권기수, ‘총석(叢石)-a yellow boat’, 90.9×116.7cm, acrylic on canvas on board,2017 1)총석은 강원도 통천군 바닷가에 있다. 목공이 칼로 깎은 듯 총총하게 서 있는 바윗돌 위에는 소나무와 풀이 자라는데 그 모습이 가히 천하 비경이다. 정선, 김홍도, 이인문, 이재관, 김하종, 정수영 등 수많은 화가들이 주상절리 기암괴석에 반해 붓을 들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2017년에도 새로운 작가가 붓을 들었다.

지난 8월이었다. 전주에서 특강을 하고 한국전통문화전당 옆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마친 후 산책 삼아 동네 구경을 나갔다.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잠에서 막 깨어난 도시의 얼굴을 보러 나갈 때면 은근하게 설렌다. 전주는 항상 올 때마다 느끼지만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려는 노력이 도시 곳곳에 배어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듯 문화의 향기도 느낄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눈에 띄는 조형물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마치 그것을 보기 위해 여행을 온 것처럼 두근거린다.

강의하러 전주 갔다 산책로서
‘단오풍정’ 패러디 작품 발견
억압 돌파하는 과감함 돋보여
잠깐 여유있는 산책이 준 선물

매사 임하는 자세도 이와같아
거문고 줄 고르듯이 적당해야
팽팽함 느슨함 알맞아야 조화


그날도 그랬다. 산책로를 따라서 걷다 뜻밖의 벽화를 발견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패러디한 작품인데 그 발생이 대단했다. ‘단오풍정’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단옷날 계곡에서 네 명의 여인이 몸을 씻고 있고 언덕에는 노란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한 여인이 그네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그네 타는 여인 뒤에는 가채를 만지는 여인과 앉아있는 여인이 있고 그림 앞쪽에는 술상을 머리에 이고 온 여인이 그려졌다. 뒤쪽 구석에는 이들을 훔쳐보는 두 명의 사미승이 그려져 있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시 여인들의 일상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보여준 수작 중의 수작이다. 그런데 전주에서 발견한 벽화에서는 구성을 전혀 달리했다. 그네 타는 여인과 계곡에서 몸을 씻는 네 명의 여인을 전면에 크게 부각시키고 나머지 인물들은 생략해버렸다. 바위 뒤에 사미승이 보이지만 그 존재감은 미미하다. 대신 그네 타는 여인이 몸을 앞으로 날려 계곡으로 뛰어내릴 듯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의 몸짓이 어찌나 힘차든지 치마는 바람에 뒤집힐 지경이고 신발 한 짝도 화면 틀 밖으로 튀어 올랐다. 용감하다 못해 돌발적이기까지 하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여성들에게 가해진 질곡과 억압을 과감하게 돌파해나가는 우리 시대의 여성상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아침산책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보물이다.

어느 도시에 강의하러 갈 때면 가능한 그 지역에서 하루 정도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장거리일 경우 장시간 차를 타고 가서 강의를 한 후 다시 장시간 차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 너무 피곤하기 때문이다. 피로는 그때그때 풀어줘야 한다는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나이 들어갈수록 더 실감한다. 밤샘을 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거뜬해지던 날도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다. 요즘에는 조금만 무리해도 금새 탈이 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헐거워지고 삐거덕거리는 몸을 폐기처분하거나 부품을 교체할 수도 없으니 그저 마지막까지 살살 달래가며 활용해야겠다. 따지고 보면 이 몸은 어떤 기계보다 가성비가 뛰어나다. 아무리 새로 만든 기계라도 10년이 지나면 고물이 되는데 50년이 넘도록 움직이는 것을 보면 대단하지 않은가. 천년 만년 쓸 수 있는 기계도 아닌데 함부로 막 쓰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써야겠다. 강의하러 간 도시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고 온 이유도 다음 강의를 위해 몸을 잠시 쉬어주기 위함이다. 그래야 다음 강의 일정에 차질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감히 몸과 싸워 이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최대한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고 대신 효율적으로 일을 시킨다. 나이 들면서 생긴 지혜다.

하룻밤을 자려고 한 이유가 꼭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기왕 가는 김에 그 도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이 아무리 좁다고 해도 생전 처음 가 본 도시가 의외로 많다. 강의가 아니었다면 평생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장소를 그나마 강의 덕분에 가게 되었으니 내게 강의하러 가는 길은 여행이나 다름없다. 물론 강의하러 갈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매번 하는 강의지만 마음의 부담은 결코 줄어들지 않아서 갈 때는 오직 강의할 내용 생각뿐이다. 당연히 바깥 풍경을 감상하거나 새로운 도시에 대해 관찰할 겨를이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멋진 장소를 봐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관심은 오직 강의에만 맞춰진다. 강의 전에는 최대한 말도 하지 않는다. 목을 아낀다는 의미도 있지만 오로지 강의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나면 달라진다. 비로소 그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음식도 맛을 느낄 수 있고 거리와 풍경도 가슴 설레게 한다. 한국이라는 같은 하늘아래 사는 사람들인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시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다. 그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다. 강의는 대부분 오전에 하거나 밤에 한다. 오전에 강의를 하면 점심식사 후에 그 지역의 유적지나 박물관에 간다. 밤에 강의를 하면 그 다음 날에 여유로운 일정을 시작하니 훨씬 더 여유롭다. 하룻밤을 편안하게 쉰 다음 느린 아침식사를 하고 숙소 부근을 산책한다. 그러면 외국 여행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가까운 절이나 탑을 보러 간다. 강의가 내게 답사와 여행을 가져다 준 셈이니 고맙고 감사한 직업이다. 

그런데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최근의 일이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먼 도시에서 강의를 해도 새벽에 내려갔다 당일치기로 올라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로지 일에 치여 사는 삶이었다. 그렇게 살아야 무엇인가를 이루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비참함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포기를 하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졌지만 전주에서 아침산책을 하며 보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쇠락해가는 몸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바쁘면 바빠서 좋고 한가하면 한가로워서 좋은데 젊을 때는 한쪽 면만을 보고 반대쪽 면을 보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나 건강하면 건강해서 좋고 몸이 부실하면 부실한대로 좋은 면이 있다. 지나치게 자신을 닦달하지 말고 자신의 상태에 맞춰서 살다보면 의외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초조함이 진정되고 가라앉는 장점도 있는 범이다.

서산대사가 쓴 ‘선가귀감’에는 거문고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공부는 거문고 줄 고르는 법과 같아서 팽팽함과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질 것이니,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며(惺惺歷歷) 차근차근하고 끊임없이 해야 한다(密密綿綿).”

이 내용은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부처님 제자의 한 사람인 소나는 밤낮으로 정진했으나 깨우침을 얻지 못했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 소나가 비관에 빠져 있을 때 부처님께서 그의 심중을 살피시고 불렀다. 그리고 정진을 거문고 줄 고르는 법에 비유하여 너무 조급히 하면 병나기 쉽고 너무 느리면 게을러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소나는 부처님께서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며 꾸준히 힘써 닦도록 하라’는 말씀을 듣고 깨치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성역력(惺惺歷歷)하고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계속해나가는 것. 그 안에 의외의 즐거움이 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