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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유마의 방

기자명 이제열

불국토 비었다는 말 분별번뇌 없는 상태 의미

“문수사리가 물었다. 거사님 이 방은 어찌하여 비었으며 시자들은 왜 없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여러 부처들의 국토도 비었습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으로 비었다하십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본래 공함으로 비었습니다. 문수사리가 또 물었다. 본래 공한 것을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분별없는 것으로 공을 체득합니다. 문수사리가 계속하여 물었다. 능히 공을 분별하여 알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다시 대답하였다. 분별이 곧 공입니다.”

불국토란 깨달음 자체 의미
분별없는 청정본연 가르켜
분별 그대로가 공임을 알면
곧 바로 불국토에 들어간다

앞에서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문병 오려 하자 유마거사는 자신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치우고 시종들을 내보낸 다음 평상에 홀로 누워 문수보살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자신의 방을 비웠다는 것은 유마거사의 마음에 일체의 분별과 번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종들을 다 내보냈다는 것은 육근의 작용을 모두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평상에 홀로 누웠다는 것은 오직 하나의 깨달음의 경계에서 만법이 본래 평등하다는 이치를 드러내 보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제 문수보살은 이 일을 들어 유마거사에게 왜 방이 비었으며 시종들은 없느냐고 질문을 한다. 이에 유마거사는 자신의 방은 부처님의 국토처럼 비었다고 답한다. 이는 유마거사의 경지는 곧 부처님의 경지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유마거사의 깨달음의 경지가 비어 있듯 모든 부처의 국토도 비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마거사가 말 한 부처의 국토가 비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의 국토라는 단어에 대해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의 나라 즉, 불국토(佛國土)란 앞의 불국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부처가 머무는 지구처럼 생긴 어떤 공간이나 세계가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한다. 불국토를 일정한 공간세계나 땅의 개념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국토가 비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과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때 비었다는 것은 어떠한 분별이나 번뇌가 없이 청정하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어떠한 생각이나 개념이나 언어나 분별이나 감정 따위가 없는 청정본연의 상태를 비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문수보살이 어떻게 하면 그 부처의 국토가 비었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느냐고 묻자 유마거사가 분별이 없는 것으로 체득한다고 답한 것이다.

‘유마경’뿐만 아니라 대승의 모든 가르침 속에는 중생이 일으키는 마음의 분별을 극복해야 할 번뇌로 보고 있다. 탐진치 만이 번뇌가 아니라 중생이 일으키는 모든 분별 그 자체가 번뇌이다. 중생들은 육근을 통해 들어오는 갖가지 경계들을 분별로써 판단한다. 이에 비해 부처님은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지혜로 경계들을 판단한다. 무분별의 지혜에서 경계들을 바라보면 일체의 경계는 유무(有無)·단상(斷常)·거래(去來)·생멸(生滅)·고락(苦樂)등의 대립을 벗어난 중도실상이다.

그런데 이 무분별에 대해 한 가지 숙고해야 할 일이 있다. 무분별은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 감정 등의 의식 활동이 끊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무분별은 분별의 공성 즉, 중생들이 일으키는 일체의 의식 활동이 실체 없고 나가 없는 공성을 무분별이라 하는 것이다. 분별의 반대가 무분별이 아니라 분별 자체가 공임을 깨달은 것을 무분별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부처의 국토가 빈 것은 분별로써 알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부처의 국토는 분별로써 알 수 없으므로 분별을 버리는 말이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공의 논리로써 분별을 버리고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분별 그대로가 공임을 깨달을 때에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간다고 답하였다. 중생들은 의식 활동을 버리고 살 수 없다. 의식이 없는 중생은 인형에 불과하다. 식물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분별로 들어가야 할 부처의 국토는 의식 활동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일체의 의식 활동이 무아이며 공이며 무자성임을 깨달아 청정해진 세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7호 / 2017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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