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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대의 천적은 바로 ‘그대 자신’

기자명 정운 스님

마음을 떠나 다른 부처는 없다

원문: 배휴가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황벽이 답했다.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과 부처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을 떠나서 다시 다른 부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배휴가 물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한다면, 조사가 서쪽에서 와서 무엇을 전한 것입니까?” 선사가 답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오직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그대들의 마음이 본래 이 부처’라는 것을 가르쳤다.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다. 그래서 ‘조사’라고 이름한다. 만약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뜻을 본다면 곧 삼승의 모든 계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닦음을 가자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은
조사선 본래성불·본각에 바탕
조사 안심법문도 공성에 입각
공성에서 볼 때 번뇌 곧 보리

해설: 배휴의 ‘부처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황벽은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답하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는 조사선의 기본 테제로 본래성불, 본각에 바탕을 둔다. 원문에서 달마가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국을 버리고 낯선 땅인 중국에 왔다(520년)고 했는데, 달마의 선법을 보자.   

달마의 ‘이입사행론’에 의하면, ‘범부와 성인이 똑같이 진실한 본성을 갖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다만 번뇌를 여의고, 참됨으로 돌아가 벽(壁)과 같은 상태에 마음이 머물러야 한다’고 하였다. 벽관은 번뇌가 접촉할 수 없는 근원적인 마음인 안심의 실천법이다. 2조 혜가가 달마를 찾아와 물었다. 

“스님.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합니. 편안케 해 주십시오.” “그대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러면 마음을 안심시켜 주리라.”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해 마쳤다.”

2조 혜가와 제자 승찬의 문답도 연장선상에 있다. 승찬이 물었다. “저는  풍병을 앓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참죄(懺罪)해 주십시오.” “죄를 가지고 오라. 그러면 참죄해 주리라.” “죄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覓罪不可得].” “그대의 죄는 다 참죄되어 마쳤다.”

3조 승찬에게 도신이라는 제자가 찾아왔다. 도신이 물었다. “스님의 자비로 해탈법문을 하나 주십시오.” “누가 그대를 묶고 있는가?” “아무도 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무슨 해탈을 구하려 하는가[何更求解脫乎].”

달마가 혜가에게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나 혜가가 승찬에게 ‘죄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나 승찬이 도신에게 ‘누가 그대를 묶고 있는가?’ 등은 모두 본래성불된 그 자리, 공성에 입각해 있다. 불안한 그 번뇌 자리가 공성의 측면에서 볼 때, 깨달음의 자리인 것이다. 번뇌즉보리, 번뇌를 끊고 나서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을 필요도 없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성론’에서는 “탐진치 3독이 곧 불성으로서 3독 이외에 다시 별도로 불성이 없다”고 하였다.

‘육조단경’에서도 혜능은 “본성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자성 가운데서 지을지언정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이 자성이 그대로 부처다”라고 하였다. 이 즉심시불 사상은 혜능의 손자뻘인 마조(709~788)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고, 조사선의 기본 테제가 됐다. 그러면 마조가 말하는 즉심시불에서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는가? 바로 평상심이요, 이 ‘평상심이 부처’라고 하였다. 누구나가 갖추고 있는 근원적인 본래의 마음, 조작이나 시비분별이 없는 평상시의 마음, 즉 ‘평상심시도’가 도출된 것이다. 그래서 마조는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고 하였다. 원문에서 황벽도 부처 경지는 원래 닦여져 있는 것이니, 수행을 가자할 필요 없다고 하고 있다.

현대인이 쉽게 근접해 볼 수 있는 선사상을 도신의 문답에서 보자. 이 세상 모든 번뇌는 외부에서 발생되지 않는다. 자신 내부에서 만들어낸 것이요, 스스로 올가미를 묶고 있다. 혹 어떤 것이든 스스로 문제 삼지 않는다면 고뇌는 없다. 자기 생각이 만들어낸 고통에 의해 스스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조병화 선생님의 천적이란 시가 있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모든 인간은 부처님처럼 해탈할 수 있는 위대한 본성을 갖고 있지만, 번뇌를 조성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다. 그러니 마음의 칼을 살리는데 쓸 것인가? 죽이는데 쓸 것인가?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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