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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법문-베트남 틱낫한 ‘고통은 세상의 반쪽일 뿐’

기자명 진우기
  • 사회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너의 슬픔에 미소 지으렴”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또한 푸른 하늘, 햇빛, 아기의 눈길은 경이로운 것으로도 가득 차 있다. 고통만 접할 게 아니라 우리는 생의 경이와 접해야 한다. 생의 경이로움은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행복하고 고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들과 행복과 고요를 나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하고 고요하다면 우리 입가엔 미소가 꽃처럼 피어나고 우리 가족과 전 사회가 우리 고요함의 덕을 보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즐기는데 연습을 요하거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가? 아니, 우린 그저 즐길 뿐이다. 우리들 삶의 매 순간이 그러하니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건 우리는 햇살을 만끽하고 서로가 곁에 있음을 낙으로 삼으로 숨쉴 때마다 그 느낌을 사랑할 수 있다. 푸른 하늘을 즐기기 위해 중국까지 갈 필요도 없고 즐겁게 숨쉬기 위해 미래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행복한 것들과 우린 지금 이 순간 접할 수 있다. 단지 고통 밖에 느끼지 못하는 삶은 참으로 슬프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때론 미소짓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우린 노력해야 한다.

아침마다 “좋은 아침!”이라고 말할 때 정말 좋은 아침이 되어야 한다. 어떤 친구가 물었다. “가슴속에 슬픔밖에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란 말입니까?” “너의 슬픔에 미소지으렴!” 난 대답했다. 우리 마음속엔 슬픔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수백만 개의 채널이 있는 텔레비전과 같다. 우리가 불성의 채널을 켜면 우린 미소 그 자체가 된다. 하나의 채널이 우릴 사로잡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우린 당면한 상황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주인의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도 바라볼 시간이 없으며 우리 자신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다. 조직화된 사회에 길들여져 우린 여유있는 시간이 생겨도 그걸 우리 자신과 접하는데 쓸 줄을 모른다. 우리가 귀중한 여유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은 수백만 가지이다. 텔레비젼을 켜고, 전화를 걸고, 차를 타고 어디로 가기도 한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낯설어 우린 마치 자신을 혐오하고 어떻게든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고요히 앉아 깨어있는 마음으로 숨쉬고 미소지을 때 우린 참 자신이 된다. 우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우리를 열면 참 자신을 프로그램이 침입하도록 두는 것이다. 물론 좋은 프로그램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소음에 불과한 것이 더 많다.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린 소파에 앉아 시끄러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우리를 침략하고 공격하여 파괴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소음에 우리 신경이 괴로워해도 우리에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끌 용기가 없다.

명상은 그 반대이다. 명상은 우리가 참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대와 같은 사회에서 명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힘을 합쳐 우리를 참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공모하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 비디오나 음악 같은 수천 가지 것들이 우릴 참자신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깨어있는 것, 미소 짓는 것, 숨쉬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우린 참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즉 현실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개개의 인간 속에는 깨어나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묻고 또 물어도 그런 역량이 없는 사람은 주변에 없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그런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고 어떤 이는 그냥 묻어두는 게 다를 뿐 모든 이가 그 역량을 갖고 있다. 이러한 깨어있을 수 있는 역량, 우리의 감성, 육체, 마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역량을 우린 불성이라 부른다.

불성은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들 안에 있는 불성의 씨앗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서 미소가 중요한 것이다. 밖에 나가 데모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미소짓고 숨쉬고 평화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여유이다.
-1987년 간행 《평화로움이 된다는 것》에서.

■틱낫한은 1926년 베트남에서 출생. 16세에 선불교에 입문. 1983년 남프랑스에 ‘플럼빌리지’란 명상수련센터를 세움. 깨어있는 삶에 대해 미국과 유럽에서 명상 수련 지도. 75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살아계신 부처님, 살아계신 예수님’(living Buddha, living Christ) ‘평화로움이 된다는 것’(Being peace)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랑’(love in Action) 등이 있다.



번역 인터넷 불교대학 진우기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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