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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황매산 영암사지-모산재-황매평전

삼세 시간이 멈춰 선 절터서 영명연수의 일갈을 듣다

▲ 천년의 시공을 응축해 놓은 영암사지.

황매산은 경상남도 서북지역의 척추로서 해인사의 가야산과 화엄사의 지리산을 연결하고 있다. 원형으로 피어 난 산봉우리들의 모양새가 매화 꽃잎과 흡사해 황매산(黃梅山)이라 했다. 황(黃)은 부(富)를 뜻하고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니 ‘부귀의 산’ 즉 ‘풍요의 산’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머금은 합천호에 하봉, 중봉, 상봉의 산 그림자가 들어앉으면 ‘세 송이 매화꽃이 물에 잠긴 듯하다’ 해서 수중매(水中梅)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황매산 정상(1108m) 아래 900m 지점에 수십 만 평의 평전이 펼쳐져 있는데 4월 철쭉과 10월 억새가 꽉꽉 들어차는 날에는 일대 장관을 이룬다. 그 산 아래, 정확하게 모산재(茅山岾) 절벽 아래 절 하나 있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는 산사다.

쌍사자 석등·삼층석탑·귀부
보물 만도 세 점 품은 폐사지

영명의 법 처음 전한 인물은
현종 때 국사지낸 ‘적연 스님’

고개길 의미의 ‘모산재’ 보다
신령스런 산 ‘영암산’이 적격

천년의 시공을 응축해 놓은 폐사지. 그 공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마저 멈춰 있는 듯하다. 시간을 삼켜버린 터와 유물들은 침묵의 선을 그어놓고 말이 없지만, 우리의 시선은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과거의 현재’를 그려내고야 만다. 절터에 남아 있는 3개의 보물, 즉 쌍사자 석등(보물 353호), 3층석탑(보물 480호), 귀부(보물 489), 그리고 금당터와 축대 등을 연구한 학계는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창건된 영암사(靈巖寺)를 우리 앞에 그려내고 있다.

▲ 영암사지 석등의 두 마리 사자는 생동감이 넘친다.

영암사지 대표 유물은 쌍사자석등이다. 석등의 상대석을 받치는 간주석은 대부분 팔각주인데 저 석등의 간주석은 사자 두 마리가 대신하고 있다. 현재 쌍사자 석등은 우리나라에 총 5기가 남아 있다. 보은 법주사 석등(국보 5호), 광양 중흥산성 석등(국보 103호), 여주 고달사터 석등 (보물 282호), 양주 회암사 석등(보물 389호), 그리고 합천 영암사지 석등(보물 353호)이다. 법주사 석등이 최고(最古)로 알려져 있는데 8세기 말 또는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9세기 중엽이나 후반으로 보고 있으니 신라 후대에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동감에 초점을 맞추면 영암사지 쌍사자가 단연 으뜸이다.

금당을 받치는 면석에는 후면을 제외한 3개의 면석에 사자 혹은 견공으로 보이는 동물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한 채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법당을 참배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서 오시라!”는 듯 앙증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누구는 사자라 하고, 누구는 삽살개라고도 한다. 석조물의 사자가 각기 다른 자체로 취한 채 등장하는 건 신라 후대라는 설이 있다.

 ▲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과 삼층석탑.
금당에 오르는 계단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다. 네 계단으로 조성돼 있어 높지 않아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돌계단 측면을 자세히 보면 새 한 마리 조각돼 있는데 극락에 살면서 부처님 법을 전한다는 묘음의 새 가릉빈가일 터다. 석조물의 가릉빈가 문양은 신라 이후에 나타난다는 일설을 참고한다면 금당은 고려 초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 후대에 조성된 금당이 확실하다면 가릉빈가 석조문양 등장은 신라시대로 올라간다.

금당지에서 남서쪽 50m 지점에 비신(碑身) 없는 두 개의 귀부가 있다. 둘 중 하나는 적연 국사(寂然 國師)의 비신(碑身)이 세워졌던 귀부다.

▲ 신령스러운 모산재가 영암사지의 품격을 더해준다.

“도둑질 하면서 참선 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 하면서 참선 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드는 것과 같다.”

천태와 화엄, 선과 정토를 꿰뚫었던 중국 송(宋) 나라 영명연수(永明 延壽·904~975) 선사의 가르침이다. 중국의 선교일치 체계를 세운 영명연수는 선가(禪家)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염불선을 주창한 인물로서 ‘종경록(宗鏡錄)’과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중국 오대(五代)에 활약했던 청량문익(文益·885~958)이 열어젖힌 법안종(法眼宗)을 크게 떨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명연수를 법안종은 제3조로, 정토종은 제6조로 칭송하고 있다.

▲ 두 귀부 중 마주한 상태에서 오른쪽의 것이 적연 국사의 귀부로 추정된다.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최초로 과거제도를 실시한 광종(재위 949~975)은 영명연수의 법을 사모해 고려학승 36명을 중국으로 유학 보냈다. 그 중 한 명이 전주 출신의 지종이다. 귀국하자마자 광종이 중대사(重大師)라는 법계를 내렸으니 그의 법기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듯싶다. 959년 지종은 광종에게 청한다.

“송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겠습니다.”

광종은 승낙했다. 영명연수 문하로 들어가 법을 사사한 지종은 천태산 국청사에 주석하고 있던 정광 대사로부터 천태교학까지 배우고 970년 귀국했다. 현종(재위 1009~1031)이 적연(寂然)이라는 법호를 내렸고 이내 왕사로 임명(1013) 했다. 따라서 영명연수의 법을 이 땅에 처음 전한 인물은 적연 국사(寂然 國師)다.

▲ 모산재에서 조망한 영암사지와 영암사.

적연 국사는 1014년 입적했다. 원적에 든 지 9년만인 1023년 후학들이 영암사에 탑비를 세웠다. 비신(碑身)은 사라졌으나 다행히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 탁본 1첩이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어 스님의 여정 일편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귀부가 적연 국사의 비신을 품고 있었을까?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혜안에 초점을 맞춰보자.

‘조형적 밀도를 보면 단연 개창조의 것이 야무지고, 중창조의 것은 섬세함이 약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암사터 돌거북의 경우 왼쪽 것이 개창조의 것이고, 오른쪽이 중창조의 것이 된다.’ (유홍준 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6’)

 ▲ 돗대바위에서 바라본 모산재 능선.

한 눈에 보아도 한 쪽 귀부는 살아 꿈틀거리는듯한데 비해 다른 쪽 귀부는 섬세함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마주한 상태에서의 오른쪽 귀부가 적연 선사 탑비라 할 수 있겠다.

숲길을 휘돌아 나오니 영암사지와 모산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황매산에서 최고의 기암절벽 절경을 자랑하는 모산재(茅山岾). 고개라 하지만 분명 산이다. 아마도 저 산을 고개 의미의 재(岾)라 한 건 황매평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나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고개라 하기에는 신령스러움마저 느껴지는 영산이다. 하여 한 때 모산재는 신령스런 바위들이 서 있는 영암산(靈巖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언제부터 모산재로 회자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가슴과 머리에는 ‘영암산’이 더 와 닿는다. 그렇다면 영암산(靈巖山) 영암사(靈巖寺)다. 

▲ 5월 철쭉과 10월 억새를 피워냈던 황매평전이 겨울 노을에 물들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했던 시간의 경계면에서 나오려는 순간 영명연수의 사자후가 태산을 진동시킨다.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면(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 마치 이마에 뿔 달린 호랑이 같아서(유여재각호·猶如戴角虎)/ 현세에는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장래작불조·將來作佛祖).’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모산재추차장. 모산재를 경유해 영암사지에 닿는 코스는 두 가지. 1코스는 모산재 주차장-돗대바위-모산재-국사당-영암사-영암사지. 영암사지 100m 전 갈림길에서 산을 올라야 한다. 모산재까지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2코스는 영암사지-영암사-국사당-모산재-돗대바위-모산재 주차장. 모산재까지의 경사는 완만하다. 영암사지에서 국사당으로 가는 산길은 영암사 도량 내 종각 옆으로 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어느 코스든 3시간 정도 잡으면 충분하다.

모산재에서 황매산 정상까지는 약 4km이며 경사도는 완만하다. 모산재 주차장에서 황매평전 아래의 휴게소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있어 승용차를 이용해도 된다. 휴게소 100m 옆에 펼쳐진 능선 일대가 철쭉·억새군락지다.

 

이것만은 꼭!

 
영암사지 삼층석탑: 높이 3.8m.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구조로써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보고 있다. 윗층 받침돌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인 균형은 깨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보물 480호다.

 

 

 

 

 

 

 
국사당: 태조 이성계가 등극을 위하여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 때 이후로 지방관찰사로 하여금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지금도 음력 3월3일이면 지역민들이 나라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영암사: 영암사지를 보호하고 있는 사찰이다. 극락보전, 종각, 요사채 등을 갖춘 제법 큰 산사다. 도량 내 등산로를 찾다가 절과 모산재가 어우러져 빚은 멋진 풍광을 놓치기 십상이다. 산을 오르기 직전 꼭 뒤돌아보기 바란다.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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