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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호피 입은 사과-정해진

기자명 임연숙

전통기법, 현재의 언어로 재탄생

▲ ‘Leopard Apple-passion’, 40×40cm, 비단에 석채·금박, 2017년.

한국화 채색화에 있어서 전통을 이야기할 때 고려불화의 기법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철학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시대에도 고려불화의 화려함과 전통 채색화의 우수한 미감은 궁중의 기록화로도 그 맥을 이어나갔지만 불화기법을 통해 많은 부분이 계승되었다. 정해진 작가는 한국화의 민화기법과 불화기법을 연구하고 계승하고 있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언어로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과 모색을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있는 작가이다. 전통 채색화의 기법은 섬세하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려 나가는 순서와 절차를 단계별로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밟아야 하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기도문을 읽어나가는 몰입의 과정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위에 모필선 반복하는
전통 채색화 기법 기반으로
익숙한 서양화 새롭게 해석

살아가면서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일까. 몇 년 전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 하기 위해 신도교육도 받고 나름 기도의 방법에 대해 귀동냥을 하기도 하고, 혼자 명상과 기도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가 얻고자 또는 되고자 하는 기도에서 그저 나를 몰입시키고 어떤 번뇌라고 하기에는 좀 크지만 아무튼 잡생각을 좀 덜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물론 여전히 바라는 바는 많지만 마구 갈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알았다고나 할까. 결론은 그 기도와 몰입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정해진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그 몰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한국화의 전통 채색화의 기법은 유화와 달리 거의 모필선의 반복으로 표현된다. 특히 인물 표현을 보면 얼굴의 질감, 의복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흐린 색감의 물감을 여러 번 칠해서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입혀나가는 과정이다. 유화의 배경이 되는 캔버스는 면 천 위에 두껍게 밑바탕을 만들어 물감을 받아주지만, 불화나 채색화로 그려진 인물화는 바탕이 얇은 비단이나 조금 두껍게 만들어진 장지의 형태다.

특히 얇은 비단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면, 한 번에 두껍게 색을 입히면 당연히 떨어지거나 비단의 섬세한 표현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섬세한 표현을 위해 비단의 틈새를 아교물로 메꾸고 채색도 흐리게 여러 번 입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법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과정은 수행의 시간과 비슷하다. 물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튜브처럼 짜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가루 입자를 곱게 갈고 아교와 섞고, 흐리고 엷게 만들에 바탕이 된 비단위에 수십 번 바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작가는 ‘사과’라고 하는 서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과일, 최근에는 ‘애플’이라는 상징성에 호피문양을 입혔다. 호피 문양은 전통 인물화에서 무인의 강인함과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데, 작가의 작품에 항상 등장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화면을 꽉 채우는 간결하고 정갈한 호피 입은 사과는 담백한 느낌과 함께 ‘매끄러워야 할 사과에 웬 털?’이라는 위트를 준다.

얼마 전 개인전에서 작가는 서양의 명화 중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초상시리즈나, 라파엘로의 ‘The Three Graces(삼미신)’ 등에 나타난 그림 속 여성의 표현을 새로운 작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과정들 또한 전통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현재의 언어로 재탄생시키고자 하는 실험이라고 여겨진다. 비단위에 채색화기법으로 서양의 명화를 재탄생시키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은 노력과 지난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작가의 실험과 모색은 또 다른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화두를 생각하게 한다. 붓 터치로 하나하나 발라나가는 마음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몰입의 기도를 시도해 본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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