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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연구원 ‘우바이’ 세미나-2. 근·현대 여성불교운동 단체와 주역

3·1운동 이후 활동 본격화…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효시

▲ 근대한국불교 최초의 여성단체인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능인여자학원을 운영했다. 1925년 ‘조선불교’ 12호에 실린 능인여자학원 직원과 학생들. 사진출처 ‘한국불교 100년’

한국 근현대기의 여성불교운동은 불교의 이념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여성들의 운동이다. 그런데 근·현대 불교사를 살펴보면 비구니와 재가여성이 연합하여 단체를 만들어 운동을 전개한 실례는 희박하다. 비구니는 출가하였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승단 내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여성불교운동은 재가에 있는 여성 신자들의 활동에서 찾아진다.

일제강점기 여성단체들
학교경영 등 계몽 활동
1950년대 마야부인회는
불교정화운동에도 나서
현대단체 사찰중심 활동

여성불교운동은 개항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신식학교의 보편화에서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 당시의 여성운동은 3·1운동 이전의 신식교육을 받았던 부류와 3·1운동 직후 외국 유학을 경험한 부류들이 합세하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은 기독교 계통에서 왕성하게 일어났기에 불교 여성운동은 3·1운동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여성운동의 흐름 속에서 불교계도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가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불교여자청년회였다. 1922년 4월에 창립한 여자청년회는 불교의 정신으로 여성의 덕성 함양과 지식의 계발을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조직은 교육부와 산업부가 있었으며, 회원은 100여명에 달하였다. 회관은 서울의 종로 사간동에 있었던 석왕사의 부지를 빌려 사용하였다. 청년회는 강연회, 토론회, 부인강좌 등을 개최하면서 능인여자학원을 경영하였다. 능인여자학원은 청년회의 교육부 사업으로 추진되었는데 초등정도의 학교로 4년급의 학생 200여명이 있었다. 청년회의 간부 5~7명이 교사로 근무하였고 교육내용은 교양, 교리강좌 등을 교육하였다. 청년회를 주도한 인물은 회장이었던 우봉운과 김광호, 이명규였다. 이들은 근대적인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들이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일반 사회의 청년운동에 동참하려는 노력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청년운동 모임은 1923년 3월24일부터 1주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였다. 이 대회는 서울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의 90여 청년단체가 참여하였는데, 타협적 민족운동을 배제하고 혁명적인 운동 노선을 기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의 토의 주제는 교육, 경제, 종교, 민족, 부인, 노동 등이었다. 종교문제 뿐만 아니라 부인과 노동의 문제가 포함되었기에 여자청년회도 가입하였다.

이후 침체를 걷던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29년 10월에 재기하였다. 1929년 10월19일, 서울 수송동 대자유치원의 창립총회에서 가시화되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재기는 남성중심의 조선불교청년회의 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불교청년회도 1925년부터는 침체를 거듭하다 1928년 초에 재기하였다. 또한 불교여성운동 재기에는 조선불교청년회의 간부였던 김태흡(대은 스님)이 원장이었던 대자유치원 보모들이 창립의 주역이었다. 재기시의 임원은 서무부 상무간사 김한득·김일엽, 재무부 상무간사 김광호·임성옥, 훈육부 상무간사 하영옥·박덕순, 체육부 상무간사 이학순·김경희 등이다. 이 명단에서 1920년대 초반의 인물은 김광호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운동의 주체가 교체되었음을 말한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발기인은 10여명이었고 전체 회원은 40여명이었다. 활동에 전력하는 회원은 20명에 불과하였지만 여성불교운동을 대표하였다. 여자청년회에서는 불교일요학교, 불교 부인강좌, 재봉학원 경영, 음악·무용대회, 친목회 등을 추진했다. 청년회에서 수행한 사업 중 주목할 것은 명성여자실업학원의 경영이었다. 이 학원은 재봉학원의 후신으로 등장하였는데 능인여자학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학원을 경영한 목적은 여성들의 직업기술 보급을 통한 포교에 있었다. 이 학원은 이후 명성학교로 승격되었고 해방이후에는 동국학원의 명성여자 중·고교가 되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31년 6월경 불교여자청년동맹으로 전환되었다. 그 당시 모든 불교청년운동 단체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합류되었기 때문이었다. 총동맹이 출범한 1931년 3월,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간부들은 이미 총동맹의 간부에 피선되었다. 박덕순이 중앙검사위원이었고, 김일엽과 김광호가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이 같은 전환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교단의 틀 안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총동맹 산하의 동맹체로 확대된 시야에서 운동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었다. 동맹체로 전환한 후에는 위상이 증대되어 지방의 부인회 20여 처에 지부를 두었다. 당시의 간부는 위원장 정귀인, 서기장 김숙경, 문교부장 김일엽, 이재부장 최순자 등이었다. 이들은 신식학교의 졸업, 일본유학, 명성여자학원 근무, 여성운동 참여 등의 성격을 가졌다.

불교여자청년동맹은 1932년 초 경성여자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전환될 때의 간부는 집행위원장 박덕순, 서기장 함기순, 회계장 김일엽, 문교부장 김수선, 검사위원 서석전·김광호 등이었다. 당시 교무원에서 정기적으로 매년 300원을 지원받았는데 이는 경성여자동맹이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 불교단체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경성여자동맹은 1936~7년경에 침체의 상황으로 전락된다. 불교청년운동의 대표인 총동맹도 이때에 접어들면서 존재 자체도 희미하였다. 1939년 1월 ‘경북불교’의 근하신년란에 경성여자동맹의 단체명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존속하였을 것이다. 당시 총동맹은 일제에 타협하는 노선을 가고 있었는데, 여자동맹도 그러하였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동질적인 입장이었을 것이다.

해방공간의 여성불교운동은 교단의 재건과 혁신의 구도에서 가시화되었다. 8·15해방 직후 불교계에서는 일제하의 교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과도 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등장하였다. 불교혁신총연맹에 가담한 여성불교단체가 있었으니 그는 불교여성총동맹과 선우부인회였다. 선우부인회는 일제하 선학원에 있었던 선우부인회의 후신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해방공간시의 정황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선우부인회가 총연맹에 가담한 것은 선학원이 총연맹에 가담하였기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여성총동맹도 총연맹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에 나오지만 여성총동맹의 창립 전후 내용, 성격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불교혁신총연맹이 1946년 12월에 창립되었기에 그 직전에 여성총동맹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여성총동맹의 선언문, 강령, 규약을 전하는 문건이 있어 단체의 성격은 가늠할 수 있다. 불교여성총동맹은 해방공간 전국여성단체총연맹에 가담하였으나, 이에 대한 세부 사정도 파악키 어렵다.

해방공간의 혁신단체가 국화여자전문의 학교를 설립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김천에서는 불교소녀회가 결성되어(1949) 미래의 어머니가 될 소녀에 대한 관심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1954년 5월부터 본격화된 불교 정화운동(비구·대처간의 갈등, 법난)에 여성 불자들도 적극 가담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여성불교운동은 불교정화의 구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선학원의 선우부인회는 1954년부터 비구 측의 정화를 적극 옹호·지원하였다. 1955년 대각사에서 황이선 보살이 주도한 신행단체(대각회)는 지성인 불자모임으로 이해되는 원각회로 이어졌다.

전국신도회가 1956년 6월에 창립되었는데, 이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한 비구승을 외호하기 위해 조직된 신도단체이다. 그런데 이 신도회 내에 부인회가 산하 부서로 있었다. 신도회에서 활약한 여성불자는 김법련화, 대원경, 무착행 보살, 송지행자 보살, 이정수(비구니) 등이었다. 이들은 정화 시에 승려들에게 쌀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비구승 측의 승리를 위해 정보 제공 및 재원을 조달하였다.

1957년에는 선학원에서 김부전(법련화), 김미희를 중심으로 마야부인회가 결성되었다. 마야부인회는 불교발전을 위하여 우선 그 사회의 핵심적인 학생을 중점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강령은 우리는 불모가 되자, 우리는 중생의 어머니가 되자, 우리는 대중불교를 건설하자 등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정화가 진행 중이었기에 주로 정화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법련화와 김미희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57년경에는 장봉옥을 중심으로 반야부인회가 창립되었고, 김무착행 보살이 주도한 선우회도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비구니를 적극 후원하였다.

1962년 6월에는 여성신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관음회가 창립되었다. 김상봉 회장을 중심으로 조계사에서 발족하였는데, 불교정화회관에서 정기법회를 가졌다. 자체 내의 ‘불교성경’을 발간하고 지도교수와 법사를 초청하여 공부를 하였다. 신행으로 관음기도와 관음행 실천을 하였다. 1965년 6월, 대한불교부인회가 문공부에 등록되었다. 이 부인회는 일제하에 결성된 불교부인회의 후신으로 해방이후에는 대한불교부인회로 개칭하여 활동하다가 이때에 와서 정식 등록을 하였다. 사업은 여성불교 해외 교류, 이웃돕기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69년 12월, 한국어머니 장학회가 설립되어 불교운동, 육영사업을 추진하였는데 각 도시에 지회조직을 두고 활동하였다.

1970년 5월 태고종은 문교부에 불교단체 등록을 신청하고 이어서 문교부도 이를 승인하였다. 이는 불교활동이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이 일단락되어 이 시점부터 여성불교운동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971년 어머니 불자들이 통도사에 모여 관음선행회를 발족하고 자비행을 실천하였다. 부산의 일념회도 발족하여 이웃돕기 사업에 주력하였다. 1977년의 연꽃모임, 1981년의 부산불심회가 발족하여 자비의 손길을 널리 펼쳤다. 그밖에도 초등교사들의 모임인 반야회와 불심회도 있다.

1974년 서울에서 결성된 불이회는 대중불교에 전념하였는데, 회원은 윤용숙·박명자·강말원 등 지식인 성격이 강한 주부불자들이었다. 불이회는 신행활동을 하면서 사회봉사에 유의하였다. 특히 불이상을 제정하여 연구, 실천, 장학, 출가 등 4분야에서 미래의 불교를 이끌 인재를 중점 육성하였다. 1978년에는 정윤희·주양자 등이 주도한 무문회가 결성되어 대중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1982년에는 불교어머니회가 발족되어 군포교 등 포교의 사각지대에 유의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86년에 여성불교봉사회가, 1988년에는 전국여성불교연합회가, 1989년에는 한국불교 사회봉사회가 각각 창립하였다. 여성불교연합회는 여성불교운동을 활성화시키려고 각처에 지부를 두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지만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듯이 다양한 활동에 대한 정리, 평가가 요청된다.

▲ 김광식 교수
현대 여성불자들의 신행은 주로 각 사찰을 근거지로 하여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별 사찰을 벗어난 조직적인 신행단체는 일부 단체가 있었으나, 부실하였다. 특히 그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한계가 있다. 전국신도회와 같은 단체 내에 부녀부가 있으나 유명무실하고, 몇몇 신행단체가 있으나 불교의 위상을 고려하면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존재 자체도 의심스러운 정도라는 평가를 지울 수 없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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