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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생사란 무엇인가-하

“‘내일 작별합시다’라고 인사하며 죽을 수는 없을까요”

▲ 성운 대사를 예방해 인사를 올리고 있는 중국불교협회 회장 학성 스님. 대만 불광산 제공

"불교의 ‘인과게’에서 ‘금생에 받는 것으로 전생에 뿌린 씨앗을 알 수 있고 금생에 짓는 것으로 미래에 받을 결과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오늘의 당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주 속에서 ‘진리’라 함은 일체 모든 것이 바로 ‘인연’ 속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인연’을 참구하여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우주만유의 일체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의 자녀들은 부모와 윗사람들을 위해 천도법회를 하고 있는데 왜 일까요? 부모님이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으실까 겁나서 천도해 드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불효한 생각입니다. 당신은 왜 당신의 부모가 천상세계에 오르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인간세상에서 태어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왜 그분들을 지옥에 가신 것으로 생각하나요? 중국에서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독송하고 천도하는 의식은 물론 사회와 사람들의 어떤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은 마치 나룻배와 같다”라고 함은 죄업이 무거워 가라앉으려고 하는 어떤 사람을 자비로 이끌어서 건네주고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천도의식 역시 이러한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독경하여 천도를 한다고 해서 당신이 여법한지 여법하지 않은지, 당신한테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사망하신 부모와 윗사람을 추모하는 기념모임을 열어 그분의 공덕과 좋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여기며 우리들이 장학금을 주거나 빈민구호, 선행 등으로 그 분을 위해 복을 짓고 인연을 맺어 좋은 인연과 축복을 그 분이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마치 유럽이나 호주에 사는 친척 친지에게 돈을 보내 도움을 주는 것처럼 그 사람은 당신의 도움 인연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망자를 기념하는 형식은 중시하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망자가 어느 곳으로 환생을 하였는가를 가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대체 좋은 곳(善道)으로 태어났는지, 인간 세상에 태어났는지 아니면 악도에 태어났는지 이 게송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정수리에 따스함이 남아 있으면 성현의 과보를 받은 것이고 눈에 따스함이 남아 있으면 천상에 태어남을 나타내고 심장이 가장 늦게 식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나타내고 배가 마지막으로 식으면 아귀도로 떨어진 것을 나타내며 무릎이 마지막으로 식으면 축생도에 빠진 것이고 발바닥이 마지막으로 식으면 지옥으로 떨어진 것을 나타낸다.(頂聖眼生天 人心餓鬼腹 旁生膝蓋離 地獄腳板出)”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전혀 황당한 소리는 아니지만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의 몸을 받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업보에 의한 것이라서 벗어날 수 있기에 인생의 미래에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감옥에서 형기가 끝나면 출소한 이후 정상적인 인생을 보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범죄를 짓지 않는 것이 좋으며 세세생생(世世生生)으로 선한 사람, 좋은 사람, 정상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몇 년 전 영국 다이애나 왕비 서거 10주년에서 아들, 친지와 친구들이 노래와 연주로 다이애나 왕비를 기념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기리는 가장 좋은 추모가 못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 사람들은 친지들의 죽음을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특히 살아서는 모두들 사이좋게 잘 살다가 죽음을 마주해서는 잘 작별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중국인들처럼 살아서는 이기심으로 싸우고 생각이 달라 반목하다가 심지어 부부간에 원수처럼 대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미움과 원망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는 천지가 무너진 듯이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의 극단적인 표현은 마치 희극과도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허상을 느끼게 합니다.

실상 사람이 죽을 때를 기다렸다가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묻고 싶습니다. 평소 살아가면서 조금 더 친근하게 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설사 죽음이 닥치더라도 너무 슬퍼할 것 없이 축복을 해주는 것도 서로 간 미래의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일부 염불하는 사람들이 떠날 때를 미리 아는 것을 저 역시 직접 본 경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61년 전후로 타이베이 염불단 단장 이제화(李濟華) 거사는 법당에서 대중들과 작별한 후 바로 왕생하였습니다. 홍콩 동련각원(東蓮覺苑) 임릉진(林楞眞) 원장은 “저는 내일 여러분과 작별할 것입니다”라고 오늘 대중들에게 말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와서는 아침식사를 하는 원장을 보고서 “작별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라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하고나서 “모두들 염불합시다”라고 하였던 원장은 이 염불소리 속에서 왕생하였습니다. 이렇게 걸림없이 사망한다면 생사라는 것이 다 같지 않겠는가, 별달리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10세 때 저는 부친의 죽음을 몰랐으며 제가 칠순이었을 때 95세이신 모친이 미국에서 돌아가셔서 급히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달려가 장례를 치렀지만 슬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친께서 고령이라 할 수 있는 95세까지 사신 것도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하고 저는 “내가 불효한 게 아닌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보다는 불가에서 살다보니 생사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저의 이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빈승도 늙었습니다. 노병사생(老病死生)이 언제 저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에 제가 젊었을 때는 죽을 때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제게 “출가자가 돼서 어찌 생사의 문턱에서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떠나지를 못할까?”라며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일까하는 염려가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죽어야 가장 좋을지 줄곧 자신을 훈련시켜왔습니다.

지금 자신이 연마해온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저 자신은 죽음에 대해 따지지 않을 것이며 단지 고통없이 잠을 자듯이 눈을 감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등잔의 기름이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이 인생의 필연적인 길이지만 저에게 생각지도 못한, 설명되지 않는 증상이 많지는 않을 테니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고 모두의 것이었으니 모든 것이 모두에게 귀속될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고 하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주고 제가 당신에게 주는 등 저의 일생에서의 온갖 인연은 저를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정한 고백’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것은 제가 가장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극락세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불교에서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라고 하는데 염불하는 사람들은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에도 극락정토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도를 깨달으면 사망한 이후에 그 사람의 총민함과 지식, 견식이 그 사람이 미래에 다시 인간세상으로 환생하도록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금생에서 염불하고 참선하여 얻은 좋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할아버지 수행은 할아버지 몫이고, 할머니 수행은 할머니 몫이다(公修公得 婆修婆得)’라고 하듯이 당신이 이렇게 수행을 하던, 저렇게 수행을 하던 필히 그에 따르는 얻는 것이 있습니다. ‘법성이 본래 공하여서 인과가 조금도 줄어듦이 없으니,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받지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法性本來空寂 因果絲毫不少 自作還是自受 誰也替你不了)라고 자항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저는 미래에 어디로 갈까요?”라고 자주 묻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귀하거나 가난하거나 비천함의 다름이 있게 되는데 바로 일반적으로 하는 말로 복이 있거나 복이 없는 것입니다. 말을 바꿔서 한다면 천당과 지옥이 모두 인간세상에 있는데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은 천당에서 사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인간 세상에 있기에 저는 사람이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치 나무와 꽃과 풀, 씨앗이 어느 곳에 뿌려졌느냐에 따라서 그 미래도 그곳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천당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인간 세상에 있습니다. 지옥은 어디에 있나요? 역시 인간 세상에 있습니다. 상적광정토(常寂光淨土), 허공(虛空)은 어디에 있나요? 모두 인간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별에는 사람이 살고 있나요”라는 오늘의 과학자들이 줄곧 연구하고 있는 문제에 제 생각에는 있습니다. 혹은 “다른 별에는 물이 있나요, 생명체가 살고 있나요”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연구할 필요도 없이 다른 세계에도 필히 같은 정황이 있을 것인데 무한한 허공이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찍이 수백만 년 전에 이미 중국인종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역사문화의 발전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석기시대, 청동기시대부터 점차적으로 농경시대, 공업시대로 도달하게 되는데 많은 시간적인 곡절을 거쳐야만 합니다.

아직 연구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남아 있는데 옛 사람 가운데 당요(唐堯), 우순(虞舜)은 도대체 몇 살까지 살았을까요? 팽조(彭祖)는 정말 800년을 살았을까요? 현재 있는 자료를 보면 ‘팽조’라는 사람이 진짜 있었는데 정말 80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지금의 60일이 일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나이를 계산하였기에 만약 현재의 계산법으로 한다면 팽조는 실제적으로 140살 전후를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156살을 살았던 당나라 시기의 보리유지(菩提流志) 스님은 더욱 장수하셨습니다.

죽음은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신비에 쌓여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교의 ‘인과게(因果偈)’에서 ‘금생에 받는 것으로 전생에 뿌린 씨앗을 알 수 있고 금생에 짓는 것으로 미래에 받을 결과를 알 수 있다(欲知前世因 今生受者是 欲知未來果 今生作者是)’라고 하였듯이 당신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오늘의 당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생일을 맞으면 축하해주고 결혼하면 축하해주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서 애도를 표하며 기려야 합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재를 지내면서 49일간 7번의 천도로 부족하다고 백일재를 지내고 주기마다 온갖 기념을 합니다. 여기에서 당신의 공덕을 보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공덕이 있으면 ‘세워 놓은 공덕과 덕망’으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려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공덕이 없으면 마치 초목이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죽음도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인간 세상에 무엇을 남겨놓고 싶습니까? 사람의 일생은 살아온 세수가 많은지 적은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남겨놓는 생명의 의의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19호 / 2017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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