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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부처를 만났을 때,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상

부처를 만나야 부처를 죽일 수도 있다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고윤숙 화가

“맑스를 만나면 맑스를 죽이고, 레닌을 만나면 레닌을 죽여라!” 권위나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전복을 시도하던 ‘혁명주의자’들조차 자신의 종조나 자신들이 믿는 지고한 가치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반대로 사실은 종조의 사유에 다른 것을 섞어 넣어 슬그머니 이탈의 선을 그리고자 할 때조차 대개는 “맑스로 돌아가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한다. 그들도 교조주의를 비판하지만, 그건 언제나 남의 교조주의에 대한 것일 뿐이다. 자신이 교조주의자일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학조차 비슷하여, 통념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는 시인들조차 가령 무언가 문제가 될 때면 여전히 ‘김수영’으로 되돌아가고 말라르메로 되돌아간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배울 게 많아서, 그토록 풍부하고 뛰어나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떤 가르침을 시작한 종조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부처 죽이라는 말은 부처 넘으라는 말
가치 부여한 그 어떤 것도 부수라는 뜻
절대 매이지 않아야 그것 넘을 수 있어

종조나 위대한 인물, 탁월한 텍스트가 사람들의 사유를 구속하고 저지하는 것은 그것의 위대한 면 때문이지 취약한 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의 강점이나 매력이 아니라면 누구도 거기 매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맑스로 돌아갈’ 이유로 인해 맑스에 붙들리고, ‘프로이트로 돌아갈’ 이유 때문에 프로이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 또한 그렇다. 불자들에게 부처란 종조의 이름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생을 걸고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 것, 아니 최고의 가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거기에 매이는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것이기에 감히 넘어서지 못하는 장애와 구속이 되는 것이다. 이는 넘어설 생각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구속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어느 것보다 강한 구속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단지 종조의 권위에 매이지 말라는 말일 뿐 아니라, 자신이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것을 깨부수라는 말이고,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를 내버리라는 말이며, 자신이 생을 걸고 얻고자 한 것을 깨버리라는 말이다. 그래야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저 내버리고 깨부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된다. 불도들에게 부처는 생을, 그것도 몇 겁의 생을 걸고라도 도달해야 할 목표이고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치다. 그것이 없다면 불도가 될 이유도 없고, 생을 살 이유도 없다. 그러니 그저 버리고 포기하고 깨부수는 것뿐이라면 그건 삶의 지향점도, 의미도 잃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임제 자신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 순간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逢佛說佛 逢祖說祖)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임제록’, 52) 그 또한 부처를 구하러 나섰고, 부처를 묻다가 황벽(黃檗)에게 세 번이나 얻어맞고는 황벽을 떠나 다른 곳에 갔다가 대오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니 부처를 얻었다 해야 할 것이다. 또 부처나 스승인 조사에 대한 더없는 믿음을 말하기도 한다. “믿음의 뿌리가 약한 자는 영영 깨칠 기약이 없다.”(31)

부처를 죽이라면서 부처를 말하고 부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어쩌라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부처는 사실 쉽게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으니 부처를 죽이려면 부처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부처의 근처에도 못 가본 이라면,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다.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부처를 죽인다’고 하는 것은 개도 웃을 일이다. 부처를 따로 구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려면 부처란 따로 구할 것도 없음을 몸으로 체득해야만 한다. 따로 구할 필요가 없음을 알지 못하면서 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여 임제는 말한다.

“큰 선지식이라야만 비로소 감히 부처와 조사를 비방하고, 천하를 옳다 그르다 하며,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물리치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고, 따라가기도 하고 거슬러가기도 하며 사람을 찾는다”(向逆順中覓人).(‘임제록’, 64)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부처’에 머물지 말고 넘어가라는 말이다. 자신이 지고하다고 믿는 가치마저 넘어가고, 자신이 생을 걸고 얻고자 하는 것도 넘어가라는 말이지, 얻고자 하는 의지 이전이나 얻을 수 있다는 믿음 이전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부처를 구하려 하면 부처에 사로잡힌다. 부처를 향해 가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을 가지 않는 게 부처를 죽이는 게 아니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부처로부터도 자유로워지라는 말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간절함을 갖고 부처를 찾아라. 믿음을 갖고 부처를 따라 가라. 그래서 부처가 있는 곳까지 가거든 거기서 부처를 죽이고 가라. 부처를 넘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 또 부처를 찾아라. 다시 부처를 만나거든 다시 죽이고 가라. 몇 번이든 죽이고 가라.

원하는 바가 없다(無願)함은 원하는 것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지 아무 의욕 없는 무기력한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무위(無爲)란 애써 하지 말라는 말이지만, 변화나 흐름을 타고 가며 하라는 말이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는 모두 자유자재하게 원하고 행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반면 부처를 죽이는 것도, 무원이나 무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것인지 알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올라갔다 내려올 건데, 뭐 하러 산에 올라가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사람과 나란히 서 있음을 보고 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산에,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에 올라갔다 온 사람은 안다.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사상이나 예술을 배우는 것도 그렇다. 조금 읽어보고 쉽게 단점을 찾아 비판하는 똑똑한 이들이 있는 반면, 단점이 눈에 보여도 뭣에 홀린 듯 배우겠다며 깊숙이 따라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전자는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그 모두를 쉽게 비판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하는 얼치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따라가 그 끝을 보는 것이다. 끝, 그 한계가 보일 때까지 따라갔을 때 비로소 그 끝을 넘어설 수 있다. 스승을 버리고, 스승을 넘어서 갈 수 있다. 스승을 죽이고 간다 함은 이런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20호 / 2017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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