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일체 흔적이 없는 마음
45. 일체 흔적이 없는 마음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7.12.19 14: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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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은 중생을 열반 이끈다는 생각 없어

실무유중생 여래도자.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착아인중생수자.
 
부처님은 ‘보살이 자신이 무여열반으로 이끈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혹시 부처님은 예외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이끈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 여래가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여래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도로 인도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상을, 인도당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중생상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자신이나 보살이나 사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음을’ 설하고 계신다. 여기에 ‘자신이 여래와 동일한 경지로 무아(無我 anatman)를 투철했다는’ 보살의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부처를 32상 등 외적인 모습으로 보면 안 되고, 일체 상이 없는 내적인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는 맥락이다.
 
여래설 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여아설 범부자 즉비범부 시명범부.
 
여래는 상주불변의 아(我 atman)가 없다고 설하지만, 범인들은 그런 아가 있는 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범부가 상주불변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
 
범부는 ‘여래가 없다고 하는 상주불변한 아를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부라는 게 상주불변한 실체로서 있는 게 아니다. 지자(智者)건 우자(愚者)건 둘 다 실체가 아니다. 고통에 빠진 자와 고통을 벗어난 자가 있지만, 어느 쪽도 상주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제 인연이 연기(緣起)하여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가 각박해진다. 범인들은 아직 아상이 있으므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보상이 없으면, 다른 이들을 돕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도움을 준 사람 앞에 가면, 기가 죽고 빚진 사람 또는 열등한 인간이 된 느낌이다. 어깨가 구부러지고 기가 살지 못한다. 그래서 피하려고 한다. 이 역시 아상이 있어서 그렇지만 그게 우리 범부들 삶이다.
 
서울 계동에 살던 고등학교 선배가 있다. 형제가 20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 아무리 작은 꼬마라도 마을 아이들이 괴롭힐 엄두를 못 내었다. 그랬다가는 이 집 아이들이 떼로 몰려와 응징했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형제는 사실은 사촌들이었다. 6.25 때 이북에 살던 선배 부친이, 피난 갈 형편이 안 되는 친척들을 대신해 데리고 내려온 친척집 아이들이었다.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들어지자, 춘부장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집장사를 했다. 친척 아이들을 자기 자식과 전혀 차별하지 않고 키웠기에, 선배는 어머니 정을 모르고 컸다. 20명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시집 장가까지 보냈지만, 일단 집을 떠난 뒤에는 평소에는 물론이고 명절에도 단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선배가 연로한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선배 어머니는 불심이 깊은 분이셨다.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큰스님들로부터 받은 글씨들이 집안에 가득했다.
강남 도산공원에 접한 마을에 살았는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부자 마을이 되었다. 다른 집들은 다 기름보일러를 썼는데 여유가 없는 이 집만 연탄보일러를 썼다. 연탄재 치우느라 힘들다고 청소부들이 불평했다. 친척 아이들 키우느라 들어간 돈이면 기름보일러는 물론이고 집을 몇 채 더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주상보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인해 아무 번뇌가 생기지 않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선배 어머니도 고인이 되고 선배도 고인이 되었다. 무상한 사바세계에는 교훈만 남아있다.
 
작은 일도 이렇게 힘든데, 모든 중생을 구하는 큰일은 얼마나 힘들까. 불보살 전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20호 / 2017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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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행 2019-01-17 15:22:00
보시? 사랑? 을 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무한한 기쁨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딱히 보상이 필요없다고 봅니다.
보상이 없는 것에 한탄한다면 거래를 한 것이지 사랑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들 눈에는 뒤통수를 맞은 격인 상황에서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잘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