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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세월이 흐르는 것 [끝]

기자명 성원 스님

다시 천진불이 된 것 같았던 시간

 
벌써 동지다. 매년 지나는 시간이지만 연말이 되면 항상 ‘벌써’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어린 시절 황진이가 지은 시조를 배웠다. 애틋하게 동짓밤을 읊은 그 시조를 배우며 당시에는 그 애절한 마음은 다 알 수 없었지만 동짓날 밤이 매우 길고도 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야 할 길이 먼 사람은 그 아득함으로 인해 시간이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 잃어버린 어린시절 꿈
똑같이 품고 있는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 세상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실제 어른이 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다. 어린 시절엔 정말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른이 되면 숙제가 없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 보였다. 우리들이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어른들은 즐겁게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어른이 되면 나도 숙제를 하지 않고 저렇게 놀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동짓날 수제비를 많이 먹으면 나이를 빨리 먹는다고 해서 더욱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있다. 새알은 자신의 나이보다 한 개만 더 먹어야 한다고 해서 늘 불평이었다. 오늘 그 말이 생각나서 나이만큼 먹어보려 했지만 쉬이 그럴 수 없다.

동짓날에는 새벽에 불공을 한다. 불공은 언제나 사시에 해야 하는데 동짓날만은 새벽에 팥죽을 공양 올리고 도량 주변에 고루고루 조금씩 부려 액운을 막는다고 한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팥죽을 먹어보았지만 나이만큼 먹지 못한 듯하다. 문득 이제 더 이상 나이를 먹을 필요도 없고 더 나이 먹어서는 안 될 나이가 되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천진불들은 내 어린 시절처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할 것이다. 문득 할머니가 되어버린 합창단장의 손을 잡고 온 어린 윤서아에게 얼른 커서 합창단원이 되라고 하니 좋아한다. 합창단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노래를 좋아하는 서아에게 어른이 되려면 팥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놀랍게도 어린이집에서 먹었다고 한다. 팥죽을 즐겨먹고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해맑은 아이를 바라보니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기만 하다.

문득 얼마 전 어느 대학병원에서 어린 영아 네 명이 한꺼번에 사망하였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 미어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먼 타인의 먼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일로인해 가슴이 이토록 아프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아픔이 전달되는 데는 거리도, 알고 모르는 것도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세음보살의 무한사랑을 설명할 때면 가끔 우리들이 관세음보살처럼 무한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조금은 의심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일로 인해 매우 역설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아픔의 전달이 거리와 시간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랑 또한 그러하리라는 깊은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 일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슬퍼하는 것 외에 별달리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도무지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도 많은 아이들은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겠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을 향에 특별히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해진다는 것을 알면 그들도 엄청나게 실망할 것 같아 바라보는 맘이 또 아프다.

나는 어린아이가 좋다. 그냥 좋다. 나의 잃어버린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좋다. 그들의 꿈이 내 어린 시절의 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들이 자란 세상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확연히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우리 세상을 위해 무언가 쉼 없이 하려한다.

‘천진불 이야기’를 1년간 연재하며 나도 다시 천진불이 된 것 같을 때가 많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넘치도록 행복한 어린 부처님의 세상도 이제는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송년의 정보다 더욱 애잔한 생각이 자꾸 든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시간의 천진불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만 같다.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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