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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공감하는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 [끝]

기자명 조정육

“누군가 말을 할 때, 이면엔 외로움이 있습니다”

▲ 정수옥, ‘21C마돈나-대화’, 260×159cm, acrylic on canvas, 2009년. 공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 자기도 그러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꼭 나의 감정과 일치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자료를 찾으러 건국대 도서관에 가는데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두 서너 시간은 걸릴 테니까 저녁밥을 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하상가에서 밥을 사먹은 뒤 생수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며칠 전부터 감기약을 먹고 있어 물이 필요했다. 마침 에스컬레이터 옆에 편의점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운터에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서 있었다. 냉장고에 넣어 둔 물 말고 실온에 있는 물 있느냐고 물었다. 요즘 날씨에는 창고에 있는 물은 얼기 때문에 차라리 냉장고에 있는 물이 덜 차갑다고 대답했다. 어찌할까 망설이면서 두리번거리는데 온장고 위에 놓인 두유가 보였다. 다행히 미지근했다. 물 대신으로 약을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대학병원 편의점 점원 아가씨
덕담 한마디에 끊임없이 대화
그 이면엔 스트레스와 고단함

보살행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에 공감해 주는 것
이제부터 입은 닫고 귀는 경청

“여기서 물 사먹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두유를 들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려는데 아가씨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럼 물 대신 무엇을 사먹어요?” “술이요. 술이요? 네, 여기가 병원이잖아요. 그러다보니 간병인들이나 보호자들이 많이 와요. 그분들이 술을 사서 마시는 거죠.”
“그렇군요. 그런데 간병하는 분들이 술을 마시면 간병을 어떻게 해요?” “원래는 안 되죠. 안 되지만 간병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으니까 술이라도 마셔서 풀려는 거죠.”

계산은 이미 끝났는데 그녀의 얘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을 쳐다보고 어찌나 진지하게 얘기를 하던지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나는 두유를 따서 감기약을 먹었다.

“그분들이 저만 보면 붙잡고 얘기를 하고 싶어 해요. 자기들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여기 서서 술을 몇 병씩 마시면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 사람들이 저만 보면 붙잡고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감기약은 이미 다 먹었는데도 내 눈에 고정된 그녀의 눈빛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편하게 대해주니까 그런가 보네요.”

덕담 한마디를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수십 년 동안 봉인된 입이 풀린 듯 그녀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환자들도 와서 소주를 사가요.” “환자가요?”
“그럼요.” “환자가 술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갈 수 있나요?” “원래는 안 되죠. 그러니까 페트병에 담아서 몰래 가지고 들어가요. 환자복을 입은 사람은 규정상 병원 건물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안되요. 그런데 그런 규정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해요. 그럼 제가 뭐라고 하죠. 아니, 병원에 입원하신 환자가 술을 드시면 안 되잖아요?”

손님에게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훈수까지 둘 수 있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해보였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세요? 자기도 그것을 아는데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거라고 대답해요. 그럴 거면 뭐하러 비싼 돈 주고 입원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날 때마다 “그렇군요”라고 계속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귀한 이야기를 듣겠는가. 현장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말 술이 문제예요.”

이제는 이야기의 주제가 간병인과 환자를 넘어 그곳에 오는 손님으로 옮겨갔다.

“한번은 학생으로 보이는 여대생이 여기에 들어왔어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서 들어온 거예요.”

그녀는 편의점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천태만상에 대해 쉬지 않고 얘기했다. 여대생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술주정하는 ‘진상고객’이 도마에 올랐다. 그녀 또한 술을 사러 온 간병인들처럼 자기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나저나 도서관 문 닫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 손님이 들어왔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처음 본 나를 붙잡고 장시간동안 하소연을 했을까. 그녀를 생각하니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조직에서 원하는 매뉴얼대로 행동해야하는 감정노동자의 애환이 느껴졌다. 모두들 참 어렵게 살고 있구나. 짠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이 상황을 언젠가 겪은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 맞다. 아버지가 그러셨지.”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을 언니 집에서 보내셨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미 수십 번 들어서 외울 정도가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 조선시대 고리짝에 넣어둔 듯 먼지가 잔뜩 덮인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까지 아버지의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진저리가 나도록 재탕되는 이야기를 듣다 지친 내가 일어서려고 하면 아버지는 무슨 중요한 내용이라도 되는 듯 마저 듣고 가라면서 붙잡으셨다. 아버지는 외로우셨던 것이다. 그때 내가 왜 조금 더 시간을 내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후회를 했었다. 그래서 혼자되신 시어머니가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 분의 당고모와 외삼촌과 방앗간집 언니에 대해 이야기를 되풀이해 하실 때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인다. 시어머니도 외로우셔서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무슨 거창한 행위가 아니다. 그저 귀만 열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가족, 친구, 동료 등을 떠올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순간을 추억한다. 평생을 돌이켜 보아도 가장 오래 남는 기억과 경험은 공감을 나누었던 순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상을 살았던 보람을 느끼게 해 주고 끈끈한 정으로 함께 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게 해주는 순간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와 공감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 내 감정에만 사로잡혀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자주 그런 대화를 한다.

“나중에 자식들이 집에 오면 입은 닫고 지갑만 열자. 매사에 너무 진지하게 설명하려 들지 말고, 내가 살아온 인생의 잣대를 들이대며 훈계하려 들지 말고, 그저 젊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어주자. 제발 많이 들어주자.”

아직까지는 그 말대로 잘하고 있는데 나이 들어서도 가능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지금까지 1년 동안 수다스럽게 떠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입을 다물고 경청해야겠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21호 / 2017년 1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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