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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좌부의 고향으로 가는 길

보물섬이 간직한 진짜 보석은 2300년 이어진 법등이다

▲ 스리랑카 역사의 주역인 싱할라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는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탑과 사원 유적들이 즐비하다. 아누라다푸라를 상징하는 대탑 루완웰리사야다고바는 지금도 스리랑카 사람들의 귀의처로 당당한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아랍 상인들은 예로부터 스리랑카를 ‘셀렌디브’라고 불렀다. 보석의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스리랑카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인도양의 보석’이라는 표현은 빠지지 않는다. 보석처럼 생긴 섬, 스리랑카는 고대로부터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 이름은 일찍이 한반도에도 알려져 있었다. 7세기 중국 당나라의 고승 의정 스님이 구법승들의 행적을 정리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고구려 출신 현유가 스승 승철선사를 따라 사자국, 즉 스리랑카에서 출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섬나라의 이름이 동방의 고구려에까지 이르렀음이다. 그러니 스리랑카가 우리에게 낯선 나라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동서양 무역의 중심이던 섬
‘보석의 땅’ 셀렌디브로 불려

인도로부터 도래한 비자야가
섬의 지배자  싱할라의 선조

기원전 3세기 첫 불교 전래 후
중국 구법승 법현 스님 비롯해
고구려스님도 스리랑카서 출가
상좌부불교 전법 구심점 되며
부처님 법음 전승·실천에 진력

1948년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스리랑카는 1972년 국호를 스리랑카로 바꾸고 1977년 우리나라와도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스리랑카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우리나라에 원조를 해주는 서남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 1956년 스리랑카를 방문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는 “실론의 교육 수준은 매우 높았고 영어로 교육하는 콜롬보대 및 페라데니야대 등 명문대를 보유하고 있다”며 스리랑카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지속된 민족 간의 갈등, 특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과 영국식민지시기 지배층으로 중용됐던 타밀족 간의 갈등이 1970년대 후반 내전으로 격화되며 스리랑카 정치, 경제, 문화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혔다. 그러나 2009년 내전 종식 후 스리랑카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해 201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이 서남아시아지역 최고인 3912달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남한 면적 3분의2, 인구 2200만명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나라. 싱할라족과 타밀족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과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민족만큼이나 다채로운 종교가 어우러진 스리랑카의 특색은 이 나라의 국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국호의 변경과 함께 제정된 스리랑카 국기에는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이라는 스리랑카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스리랑카 국기는 화합을 상징하는 진한 노란색 바탕 위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녹색, 힌두교를 상징하는 주황색의 직사각형이 왼쪽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에는 갈색의 사각형 안에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 잎이 각 모서리에 그려져 있고 가운데에는 주권을 상징하는 칼, 싱할라족을 상징하는 사자가 위치하고 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 그리고 불교가 어우러져 있지만 불교의 권위는 절대 우위이며 그 중심에 있는 싱할라족은 이 섬의 명백한 지배자임을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싱할라족은 언제부터 이 섬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스리랑카의 고대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 ‘마하왐사(Mahavamsa. 大史)’에는 싱할라족의 유래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 시작은 기원전 6세기 인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벵갈지방의 고대왕국 칼링가국의 공주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사자에게 납치당해 동굴에서 함께 지내며 쌍둥이 남매를 낳는다. 사자의 자손인 이들 남매의 이름은 싱하바후와 싱하시발리. 하지만 남매는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사자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어머니와 함께 도망친다. 공주와 아이들이 사라졌음을 안 사자는 이들을 찾아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위협한다. 이때 쌍둥이 남매가 나서 사자를 죽이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후 나라를 세운 남매는 결혼해 아들 위자야를 낳지만 그의 행실이 난폭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추종자 700명과 함께 배에 태워 바다로 추방한다. 파도에 휩쓸려 남쪽으로 떠내려 온 위자야 일행이 당도한 곳이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위자야는 이곳을 다스리던 원주민 여왕 쿠베니와 결혼해 스리랑카의 지배자가 되지만 섬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쿠베니를 죽이고 인도 공주와 결혼해 자손을 번성시킨다. 위자야의 자손들은 이후 스리랑카의 주인이 되었으며 사자의 후예를 뜻하는 ‘싱할라’로 불렸다.

▲ 스리랑카의 국제 관문인 반다라나이케국제공항 입국장에는 부처님좌상이 조성돼 있다.

이민족이었던 싱할라족이 스리랑카의 지배자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은 위자야의 후손 판두카바야가 기원전 4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수도로 정하고 그의 아들 데바남피야팃샤가 기원전 3세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다. 이때부터 스리랑카는 ‘불교왕국’으로 인류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불교의 도래와 함께 찬란한 스리랑카의 문화도 그 꽃을 피웠다. 이후 수많은 이들, 특히 경전을 구하고자 길을 떠난 구법승들의 발길이 스리랑카까지 닿았다.

하지만 스리랑카로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멀고 험하다. ‘불국기’를 남긴 5세기 중국 동진의 법현 스님은 인도의 갠지스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계절풍에 의지해 14일 만에야 스리랑카에 닿았다. 7세기 현장 스님도 불치사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친견하길 희망했지만 때마침 스리랑카에 닥친 기근과 전쟁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1978년부터 2009년까지 계속된 내전이 외국인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2018년, 스리랑카로 가는 길은 눈 깜빡할 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롬보와 서울을 왕복하는 직항기가 운항되고 있어 8시간 남짓이면 인도양의 보물섬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스리랑카의 국제관문 반다라나이케국제공항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입국장에는 인도 사르나트박물관의 불좌상을 쌍둥이처럼 빼닮은 하얀 부처님상이 스리랑카에 들어서는 외국인들을 맞이한다. 사르나트불좌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모습을 이곳 스리랑카의 관문에 조성해 놓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초전법륜으로부터 이어지는 부처님의 법음이 이 땅에 살아있음을 각인시키려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긍심과 신심이 저 부처님의 미소 속에 담겨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불법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으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졌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후대인들은 이 두 줄기의 전법을 북방불교와 남방불교, 혹은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로 구분해 불교사의 흐름을 정리했다. 북방으로 전래된 불교가 부처님 가르침에 담긴 근본정신을 깊이 있게 해석하며 끝없는 쇄신의 길을 걸었다면 스리랑카를 교두보로 삼아 남방으로 전해진 또 하나의 법등은 엄격한 계율의 실천과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삼장의 전승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생생한 법음을 전하고 실천해 왔다. 이 남방불교의 구심점이 된 스리랑카는 그러한 까닭에 ‘남방의 법등’ ‘상좌부불교의 고향’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구법승들로부터 오늘날 성지순례를 떠나는 신심 깊은 불자들에 이르기까지 스리랑카로 향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터다.

▲ 다종교사회를 상징하는 스리랑카 국기.

잠시 옛 기록을 살펴보자.

‘왕은 청정하고 범행을 닦아서 성 안 사람들의 공경과 신뢰의 정이 또한 두터웠다. 이 나라가 세워지고 다스린 이래로 굶주림, 흉년, 재앙, 혼란이 없었다.’

5세기 법현 스님이 ‘불국기’에서 ‘사자국’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스리랑카의 모습이다. 그런가하면 당나라의 현장 스님도 ‘대당서역기’에 스리랑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현장 스님은 스리랑카를 직접 순례하지 못했다. 아마도 앞서 스리랑카를 다녀간 법현 스님의 기록에 매료돼 스리랑카를 동경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 퍼진지 200여년이 되자 각자 자신들의 전문적인 학문을 천명하게 되었으며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성립되었다. 그 중 하나는 마하비하라주부인데 대승을 배척하고 소승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발사기리주부로서 이승을 겸하여 익히고 널리 삼장을 펼치고 있다. 승도들의 계행은 정결하고 정혜가 바르고 맑으며 풍모가 스승으로 섬길 만하여 위의가 참 아름답다.’

이밖에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도 ‘사자국’ ‘사자주’ 혹은 ‘승가라국’이라는 이름으로 스리랑카를 언급하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스님 11명이 시대를 달리하며 스리랑카로 향했음을 전하고 있다.

그 옛날 스리랑카는 과연 역사 속의 기록과 같았을까. 그리고 오늘날 스리랑카는 이러한 역사의 계승자로서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라는 당당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떠나는 스리랑카로의 여정은 감히 역사의 진실을 구명하는 대장정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상좌부불교의 의미와 부처님의 생생한 법음 속에 간직돼 있는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의 출발지는 신성도시 아누라다푸라다. 반다라나이케국제공항에서 북동쪽으로 160km 가량 떨어져있는 이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 역사의 출발점이자 찬란하고도 참혹했던 스리랑카불교사의 중심무대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공항을 빠져나와 곧바로 아누라다푸라로 향한다. 고속도로가 미비한 스리랑카에서 아누라다푸라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족히 4시간은 각오해야 한다. 여명이 밝아오는 가운데 두꺼운 역사서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스리랑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 전 보물섬이라 불렸던 이 작은 섬의 진짜 보물, 2300여년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찬란한 법등이 그 여명 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콜롬보=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공동기획 : 아미타여행사 02-743-1080


[1425호 / 2018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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