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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진 스님-상

‘화합 종단’ 소망 이루지 못하고 163일만에 쓸쓸히 퇴장

 

▲ 석진 스님

한국 현대사는 파란의 역사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냉전과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군부세력의 등장, 독재와 인권유린의 긴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민주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통합종단 첫 총무원장 취임
대처측 추천으로 선출됐지만
취임식서 ‘정화’의지 드러내
‘배제식’ 정화에는 반대입장

통합종단, 군사정권 의지반영
비구·대처 어색한 동거일 뿐
초대 종회의원 선출 갈등으로
통합종단 5개월 만에 ‘파국’

한국불교계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탄압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일제강점기와 마주해야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을 이끈 이승만 대통령은 노골적인 종교편향을 꺼리지 않았던 개신교인 대통령이었다. 불교계는 이런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 나갔다. 때로는 정권을 적극 옹호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권과 결탁해 비난의 대상이 됐으며, 때로는 정권의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기도 했다. 그 불교계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 바로 총무원장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사찰주지의 임명권과 사찰재산의 감독, 처분권 등 종무행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질 뿐 아니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당연직 회장을 맡는 명실상부한 불교계 최고의 행정수반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1962년 4월11일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을 시작으로 지난해 말 임기를 시작한 설정 스님까지 35대째 이어오고 있다. 이 중 서울 칠보사 조실이었던 석주 스님이 3회, 청담, 경산, 영암, 의현, 자승 스님이 2번씩 맡았으므로, 지금까지 총 27명이 총무원장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 총무원장 스님들의 행적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간단한 행장조차 찾아보기 어렵거나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조차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법보신문은 석진 스님부터 지난해 임기를 마친 자승 스님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소개하는 기사를 격주로 연재한다. 이를 통해 총무원장 스님들의 종교지도자로서 행적뿐 아니라 출가자로서의 삶의 궤적도 조명할 계획이다. 편집자

1962년 4월11일은 조계종에 있어 뜻깊은 날이었다. 8년간 극한 대립을 이어왔던 스님들이 그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종단조계종을 출범시키기로 한 날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서울 조계사로 쏠렸다.

‘대한불교’(1962년 5월1일자)에 따르면 이날 조계사 대웅전에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찾은 스님과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최고회의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손창규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김상협 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요인과 미국 대사관 관계자가 법당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불교계 행사에 장관과 미국 대사관 간부까지 참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이 갖는 의미는 지대했다.

이날 법회는 삼귀의와 국민의례, 경과보고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비구측의 추천으로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효봉 스님이 법석에 올라 교시를 내렸다. 스님은 “만물이 꽃피는 이때 불교종단이 단합했음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며 “우리는 앞으로 시들지 않는 한국불교의 꽃을 가꿔 나가자”고 말했다.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도 통합종단 운영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스님은 “우리 불자들이 지난 8년간 대립으로 분쟁을 지속하였음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는 바”라며 “이제 불타의 근본정신을 받들어 종단의 기강을 바로잡고 시대 요구에 적응해 대승불교를 실천함으로써 우리에게 부과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총무원장으로서 종단 정화와 재건에 역점을 둘 것임을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정화란 탁류에 오물을 제거하듯 지금까지의 모든 병폐를 발본색원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며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그치면 한갓 구두선에 그칠 수 있으니 시급하게 정화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말했다. 비록 대처측의 추천으로 총무원장에 오른 석진 스님이었지만, 스스로도 종단 정화에 확고한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법회는 각계 인사의 축사와 공초 오상순 시인의 축시낭독, 꽃다발 증정, 사홍서원을 끝으로 성대하게 마무리 됐다. 모처럼 화합의 웃음꽃을 피운 조계사 풍경에 세간의 기대감은 컸다. 불교계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던 언론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불교분쟁 해결을 환영한다”며 “이제까지의 분규를 청산하고 삼보 앞에 귀의하는 화동(和同)의 식을 올렸으니 이런 다행이 없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도 “(조계종이) 8년간 끌어오던 분규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으로 종단의 기능을 완전회복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통합종단조계종의 행보는 순탄할 듯 보였다.

그러나 8년간 지속된 갈등의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비구·대처측은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번번이 기싸움을 이어갔다. 이는 통합종단 집행부 구성 당시부터 예견돼 일이기도 했다. 사실 통합종단 출범은 비구·대처측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의 반강압적 중재에 의한 결과였다.

‘조계종사’(조계종 교육원) ‘불교정화의 성찰과 재인식’(김광식)’에 따르면 박 정권은 1961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로 촉발된 비구·대처간 분쟁이 지속되자 직접 개입할 것을 시사했다. 당시 양측은 서울 조계사를 두고 끊임없는 쟁탈전을 벌였다. 비구측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조계사를 사실상 장악했고, 대처측은 서울 법륜사에 근거지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정권은 “비구·대처가 동수로 참여하는 불교재건비상종회를 조직해 모든 분쟁을 수습하고 단일종단을 만들며, 법원에 계류 중인 모든 소송은 취하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부측의 제안에 조계사측도, 법륜사측도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 최고의장은 1962년 1월13일 직접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가 제시한 방안이 이행되지 않으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조계사·법륜사측은 1월18일 정부의 중재안을 수용하고 불교재건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 통합종단조계종 초대 집행부 스님들이 1962년 4월12일 사무 인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

불교재건위원회는 4차에 걸친 회의를 통해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고 종헌 제정과 집행부 구성 등을 통해 6개월 내에 단일종단을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불교재건비상종회는 양측의 입장차가 뚜렷해 종헌 제정과 집행부 구성에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어렵게 종헌은 제정됐지만 집행부 구성을 두고 양측은 다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결국 정부는 양측 대표 각 15명이 참여했던 불교재건비상종회를 해산하고 양측 각 5명에 사회인사 5명을 포함하는 새로운 비상종회를 구성했다.

비상종회는 4월1일 회의를 열어 집행부 선출을 진행했다. 그 결과 종정은 조계사측 효봉 스님이, 총무원장은 법륜사측 석진 스님이 선출됐다. 양측을 안배하겠다는 사회 인사들의 표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투표결과가 나오자 조계사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태고종사’에 따르면 이날 조계사측 대표로 나온 청담 스님은 “종정과 총무원장은 우리 측에서 맡고, 원장 밑에 부장 2명을 법륜사측에 선임함으로써 현실문제가 타결될 것으로 믿었다”며 “그러나 이것으로서는 불교정화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만사가 이로써 끝난 것”이라고 소리치며 회의장을 퇴장했다. 이에 따라 나머지 임원선출은 추후로 연기됐다. 그러나 군사정권 아래서 조계사측의 반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상종회는 4월6일 문교부에 다시 모여 나머지 임원선출의 건을 논의하고, 감찰원장에 문성(조계사측), 감찰부원장에 흥덕(법륜사측), 총무부장에 월하(조계사측), 교무부장에 정영(조계사측), 사회부장에 남채(법륜사측), 재무부장에 기종(조계사측) 스님을 각각 선출했다. 또 4월11일 신임 종단 집행부 취임 및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식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의 강한 의지에 따라 조계사와 법륜사측은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종단 운영에 대한 생각은 사뭇 달랐다. 때문에 통합종단 조계종은 출범 이후 끊임없는 파열음을 냈다. 특히 조계사측은 불교정화를 위해서는 법륜사측 스님을 종단 집행부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이는 총무원 국장 등 실무임원 선출문제를 두고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태고종사’에 따르면 종정 효봉 스님은 1962년 5월3일과 6일 총무원장 석진 스님에게 서한을 보내 “비구승을 우대하고 대처승과는 차별화하라” “(국장 등) 실무직 인선을 빨리 하되, 비구승 위주로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석진 스님은 “독신승만으로 임직원을 임명하는 것은 화동단합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며 “(직원 인선은)총무원장의 권한에 속하는 일로 괘념치 말아 달라”고 맞섰다. 그리고 총무원 4개부 8명의 국장을 조계사와 법륜사측 스님으로 균등하게 나눠 임명했다. “양측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종단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원만한 방안”이라는 석진 스님의 소신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화동 종단’을 구성하겠다는 석진 스님의 의도는 얼마 되지 않아 좌절을 맞았다. 그해 8월20일 비상종회가 통합종단조계종 새 중앙종회의원을 선출하면서 조계사측에서 32명, 법륜사측에서 18명을 뽑았기 때문이다. 이는 향후 종단 운영의 주도권이 조계사측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중앙종회는 총무원장 및 총무원 각 부장의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신임권도 부여됐다. 따라서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조계사측이 종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법륜사측은 강하게 반발했고, 총무원장 석진 스님도 크게 낙심했다. 석진 스님은 일찍이 송광사로 출가해 평생 독신비구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정화’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무조건 상대를 내치는 방식의 정화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종단에서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직감했다.

결국 9월20일 총무원장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스님은 “(나는) 원래 종단이 통합된다고 하기에 그 종단을 운영하기 위해 취임한 것이지 대처승이나 독신승의 어느 일방의 총무원장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화합이 무너지고 불교재건의 여망도 없는 현 상황에서 독신승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4월11일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지 163일만의 일이었다. 석진 스님의 사퇴와 함께 통합종단 초대 집행부에 참여했던 법륜사측 간부스님들도 동반퇴진을 선언했다. 또 법륜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조계종 설립을 예고했다. 이에 따라 일시적으로 통합했던 조계종은 다시 양분됐다.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은 이후 대처측 추천인물이라는 이유로, 또 비구라는 이유로 조계종과 태고종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25호 / 2018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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