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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노파마 ③

기자명 김규보

“너는 어둠이 두렵지도 않느냐 적막이 불안하지 않단 말인가”

문을 열자 별빛이 바싹 다가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별의 감촉을 어루만졌다.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진리의 빛이 손끝에서 반짝였다. 목걸이와 팔찌를 빼고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흙으로 얼굴을 문질러 화장을 털어냈다. 덧입혀진 것들 벗겨져 헐거워진 육신이 바람 따라 한들거렸다.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별빛이 반짝였다.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을 것이다. 아노파마는 붓다가 계시는 곳을 향해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디뎠다.

속세 물건과 화장 털어내고
붓다 향해 첫발걸음 내딛어
벅차오르는 기쁨 온몸 흡수

한참을 흐느끼던 맛자가 홀린 듯 집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딸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딸의 몸을 감쌌던 것들이 보이자 그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신발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너는 저 어둠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너는 저 적막이 불안하지 않단 말이냐. 너는 남기고 간 이것들이 가엾지 않단 말이냐.’ 신발을 쥐고 하늘에 맞닿을 만큼 높게 솟은 지붕을 돌아보았다. 매끈한 장식들이 맹렬한 기세로 별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신발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 미동도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맛자가 문득 하인을 불렀다.

“딸은 붓다라는 자에게 간다고 하였다. 충직한 이를 한 명 골라 딸의 지근거리에 머물며 일거수일투족을 글로 쓰게 하라. 그리고 몸이 날쌘 이를 한 명 골라 글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하라. 딸에게서 심경의 변화가 보이거든 지체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라.”

얼마 뒤, 부스스한 몰골의 하인 둘이 나와 인사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맛자는 그 그림자까지 사라진 뒤에야 목걸이와 팔찌, 신발을 하나하나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붕을 돌아보았다. 매끈한 장식에 닿아 부셔진 별빛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맛자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딸은 곧 자신의 우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집으로 들어온 맛자는 차가워진 딸의 물건들을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승원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에 있었다. 이른 밤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맨발에만 의지해 걸어온 아노파마였다. 어둠을 헤집는 동안 헝클어졌던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다듬고 발등에 묻은 흙을 씻어 내렸다. 머리끝까지 올라갔던 숨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 승원 안으로 향했다. 수백 명의 인파가 정원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노파마는 고개를 들어 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매순간들이 현재 속에서 일어나고 스러졌으며 이곳은 과거의 그곳도 미래의 저곳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뚜렷이 보았고 명확히 들었다. 처음 목도한 승원의 광경들이 다신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각인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저 멀리로 물러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았다. 아노파마는 눈을 감고 차오르는 기쁨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시선들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원 밖에서 누군가 발우를 손에 쥔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른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했다. 새들의 지저귐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아노파마는 사람들을 따라 몸을 깊숙하게 숙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땅을 향한 아노파마의 시야에 불룩 솟은 발등이 들어왔다.

“아노파마여, 고개를 들라.”

융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굽지 않은 반듯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들자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이 아노파마의 눈을 흐려놓았다. 심장이 몸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잠시 뒤, 태양에 멀었던 눈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단정한 가슴과 둥근 어깨. 붉은 입술과 감청색 눈. 너르고 평평한 이마와 높은 정수리. 미간의 빛은 태양보다 눈부셨다. 아노파마는 비로소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붓다시여….”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5호 / 2018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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