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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노파마 ④

기자명 김규보

“붓다시여, 보았고 알았습니다”

“아노파마여. 네가 살아온 나날들을 보았다. 그리고 밤새 어둠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갸륵한 여정이었구나. 이제 마땅히 당도하여야 할 곳에 이르렀으니, 너를 옭아맸던 첫 번째 족쇄는 끊어졌다.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붓다 만난 아노파마
자신 인도한 무엇 궁금해져
머리카락 자르고 수행 정진

기쁨에 휩싸인 아노파마가 붓다의 두 발에 입을 맞추었다. 아득해졌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며 둥글게 모여들었다. 영겁과도 같던 직전 순간이 영원불변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승원은 다시 한 번 정적에 잠겼다. 아노파마는 불현듯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붓다시여. 두고 온 곳에서의 생활은 저를 갉아먹는 괴물과 같았습니다. 음식을 게워내는 일이 빈번했으며 몸에 걸친 치장은 견딜 수 없이 무거워졌습니다. 쾌락에 겨워질 때마다 헐벗은 심정이 되어 별빛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는 항상 알고 싶었습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시여. 저를 여기로 인도한 그것은 무엇입니까.”

더욱 깊어진 붓다의 미소가 아노파마의 얼굴에 와 닿았다. 주변의 광경과 소리가 거듭 순간 속에 잦아들었다. 아노파마는 눈을 감았다. 별빛처럼 자애로운 음성이 정적을 가르고 귓가에 내려앉았다.

“물에 빠진 이가 물에 빠진 것도 모르고 가빠오는 숨에 고통스러워하다 부유하는 널빤지를 부여잡았다. 허우적거림을 멈추고 숨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널빤지는 곧 물에 녹아 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널빤지가 재차 찾아와주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조금만 나아가면 뭍이 있었으나, 물에 빠진 사실을 몰랐으니 뭍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아노파마여, 돌아보라. 너를 여기로 인도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순간 속에 잦아들었던 모든 것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노파마를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쾌락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별빛을 좇고자 했지만 그것은 갈구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쾌락에 겨웠다 믿었고, 별빛에 닿으려 노력했다 여겼지만 그것은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물에 빠진 것도 모른 채 널빤지의 행운이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노파마는 눈을 떴다. 별빛이 사라졌다. 두 번째 족쇄가 끊어졌다.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어떤 형상도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 네 모습은 억겁 가운데 찰나임에도 찰나가 억겁에 이를 것으로 믿어왔다. 아노파마여, 육신과 감각과 마음을 살피고 법을 보아라. 저기 뭍이 있다. 그곳으로 나아가라.”

아노파마는 그 자리에 앉아 육신과 감각과 마음을 살폈다. 피부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갔고 허옇게 드러난 뼈가 흙에 섞여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쾌락을 혐오했던 마음과 별빛을 갈구했던 마음이 앙상한 것들을 타고 올라왔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아노파마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 모습은 억겁 가운데 찰나이거늘, 찰나가 억겁에 이를 것으로 믿어 번뇌에 휩싸였다. 아노파마는 눈을 떴다. 별빛이 사라진 자리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족쇄가 끊어졌다.

“붓다시여, 보았습니다. 또한 알았습니다. 번뇌의 무더기는 흩어졌습니다.” “장하다 아노파마여.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제 더는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노파마여, 더욱 정진하라. 완전한 깨달음이 멀지 않았다.”

아노파마는 일어나 붓다에게 합장한 뒤 우물가로 향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은 다가온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표면에 비친 얼굴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별빛을 닮아 있었다. 가슴에 품어왔던 단도를 꺼내 머리카락 깊숙이 넣었다. 잘려진 머리카락들이 허공을 갈랐다. 아노파마는 자리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붓다가 계시는 곳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6호 / 2018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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