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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진 스님-하

불교정화 소용돌이에서 쓸쓸히 잊혀져간 비운의 학승

 

▲ 석진 스님은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했지만 대처측에 섰다는 이유로, 또 비구라는 이유로 조계종과 태고종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심지어 조계종 총무원 홈페이지 역대 총무원장 소개란에서 스님의 사진은 누락됐으며 득도년도도 ‘확인불가’라고 표시돼 있다.

12세 나이에 송광사로 출가
동국대 전신 중앙학림 졸업
3·1운동 참여로 일경에 감시

송광사로 돌아와 강사로 활동
‘송광사사고’ ‘금강경역해’ 등
전문 학자도 힘든 저술 남겨

총본산 태고사·종단 건설 앞장
총무원장·동국대 이사장 등
한국불교 근대사 큰 족적 남겨

“스님은 송광사를 중흥했고, 중앙의 단일종단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정광고등학교 교장, 동국대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종립학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처럼 힘겹고 바쁜 일을 하면서도 스님은 전문학자로도 하기 힘든 연구와 저술에 또한 몰두했다.” (김영태 동국대 명예교수)

“화상께서는 불교를 다른 종교와 달리 종교와 철학의 양자를 함축한 미래세계의 지도적 이념이 될 것이라고 많은 저술을 통해 역설하셨다. 이런 화상의 가르침은 시대를 앞선 혜안이 아닐 수 없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 서돈각 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석진 스님은 단순한 학자만이 아니라 우리 불교계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교정가(敎政家)요, 덕행자(德行者)이며 교화가(敎化家)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 뇌허 김동화 박사)

“석진 스님은 뛰어난 학승이면서 출가자로서 청빈함을 잃지 않은 분이셨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스님이셨지만 성북동 청룡암에서 입적하실 때 가진 것이라고는 가사, 장삼, 발우와 평생 쓰신 원고 밖에 없었다.” (한국불교금강선원 총재 활안 스님)

기산당 석진 스님은 당대의 많은 이들이 평가하듯 뛰어난 학승이었다. 전통강원과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을 나와 불교의 내외전을 익혔으며 송광사 강사, 동국대 교수로 활동했다. 송광사 개산 이후 산재된 사료를 집대성한 ‘송광사사고’ 4권과 이를 하나로 모은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지’를 비롯해 ‘금강경역해’ ‘불교금언성전’ ‘불교우주인생관’ ‘불조법어성전’ ‘불교문답’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송광사 주지, 조선불교조계종 교무부장,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 통합종단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50~60년대 불교정화 과정에서 대처측에 섰다는 이유로, 또 비구라는 이유로 조계종과 태고종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석진 스님은 1892년 5월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태어났다. 12세 되던 해 송광사 인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호붕 스님을 계사로 수계했다. 화엄사에서 대강백 진응 스님으로부터 전통 경학을 배웠고, 강원을 나온 이후에는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에는 ‘3·1만세운동’에도 가담했다. 스님은 당시 상황을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듣던 학생 무리의 하나로 참여했다. 이때 나이 28세였다. 그때 독립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우리는 독립만세 삼창을 외친 후 종로 네거리로 나와 달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다시 서울역 광장과 의주로를 거쳐 서소문내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 이르러, 영사에게 이 뜻을 전달하고 또 만세를 부른 후, 광화문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하고 해산하니,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있었다.” (‘기산문집’ 중에서)

이 일로 일본 경찰에 감시를 받게 되자 졸업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귀향을 결정했다. 출가본사인 송광사로 돌아온 이후 지방학림과 전문강원 강사를 맡아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1932년 송광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사찰 재건에 힘썼다. 수많은 전각을 다시 세웠으며 송광사 사격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송광사사고’를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던 송광사 관련 사료들을 일일이 수집했고, 그 내용을 하나하나 대조해 방대한 분량의 ‘송광사사고’ 4편을 저술했다. ‘산림(지리)’ ‘건물(사원)’ ‘인물’ ‘잡부’ 편으로 구성된 ‘송광사사고’는 송광사 개산 이래 당대까지의 역사, 인물, 성보를 총망라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사고에는 송광사가 포함한 산림의 규모, 조계산으로 불리게 된 연원, 송광사 창건 유래, 보조국사에서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법맥 계보 등이 상세히 기록됐다. 심지어 보조국사 때부터 당대까지 역대 주지들의 임기를 분석해 “보조국사부터 임진왜란까지 주지임기는 자율에 맡겼고, 이후부터 순조 30년 경인(庚寅)까지는 6개월, 익년 신묘(辛卯)로부터 융희(隆熙,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4년 경술(庚戌)까지는 1년, 이후부터는 현재까지는 3년을 1기로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석진 스님이 중앙무대에 첫 발을 내디디게 된 것은 1937년경이다. 이 무렵 불교계는 교단 통일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총본산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31본산을 총괄하는 대표 기구와 사무소를 설립한다는 취지였다. 총본산 건설은 31본산주지회의가 중심이 됐다. 송광사 주지 석진 스님도 총본산 건립에 적극적이었다.

‘일제하 불교계의 총본산건립운동과 조계종’(김광식)에 따르면 31본산주지회의는 1937년 2월28일~3월5일 회의를 열어 총본산 건설을 통한 종단 창설을 결의했다. 석진 스님은 상명 스님과 함께 총본산건설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전국을 돌며 총본산 건립에 따른 재원 마련에 나섰고, 그 결과 1938년 10월25일 현 조계사 위치에 ‘조선불교선교양종 총본산 각화사’가 건립됐다.

이후 주지회의는 수차례의 논의 끝에 1940년 7월 태고국사 정신을 이어 각화사 명칭을 태고사로 바꾸고, 종단명칭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변경했다. 이어 1941년 4월 조선총독부가 31본산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종헌성격의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을 인가하면서 1941년 5월1일 조선불교조계종이 공식 출범했다. 초대 집행부도 구성돼 종정에 한암, 종무총장에 지암(이종욱), 서무부장에 법룡, 재무부장에 원찬 스님이 선출됐다. 석진 스님도 교무부장으로 종단 집행부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1910년 전후부터 전개돼 온 한국불교의 자생적, 자주적 종단 창설의 염원이 마침내 실현됐다.

그러나 ‘조선불교조계종’ 출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최병헌(서울대 명예교수)은 ‘한국불교 역사상의 조계종’(불교평론, 51호)에서 “태고사와 조계종 창종의 이면에는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준다는 미명으로 불교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고차원적 술책에 기인한 것”이라며 “조선불교조계종 창립은 한국불교의 발전과는 무관한 것이며, 친일적이고 어용적인 식민지불교의 완성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김광식(동국대 특임교수)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성립과 성격’에서 “어용적, 식민지불교의 성격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한국불교 내부의 종단건설운동이라는 지향과 역사적 의의를 폄하, 부인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펴기도 했다.

 

 

 

 

송광사에 세워진 석진 스님의 비. 이 비는 1973년 4월15일, 석진 스님의 상좌 인곡 스님이 사비를 들여 건립했다. 석진 스님이 입적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해방과 동시에 불교계에도 큰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조선불교조계종 집행부는 일괄 사퇴했다. 석진 스님도 송광사로 돌아가 후학양성과 포교에 전념했다. 1945년 송광사 광주포교당 포교사, 1949년 전남종무원장을 차례로 맡았다.  전남도청의 요청에 따라 전라남도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전라남도사’를 편찬한 것도 이때였다. 1951년에는 교육에 큰 뜻을 두고 정광고등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4년 5월 불교계에 폭풍이 몰아쳤다. “가족을 거느린 스님들은 사찰에서 떠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불교정화’라는 대혼란이 시작됐다. 이무렵 종단은 1941년 출범한 조선불교조계종을 폐지하고 ‘조선불교’로 칭했다. 초대 교정은 한영 스님이 맡았으며 한암, 만암 스님이 뒤를 이었다. 종단을 총괄하는 총무원장도 법린, 원찬, 지암, 성하 스님이 맡았다. 그러나 만암 스님은 교정체제를 강하게 부정했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해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고 종맥을 이어왔지만 ‘조선불교’라고 칭하는 것은 그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만암문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만암 스님의 강한 문제제기로 ‘조선불교’는 1954년 6월20일 종단 명칭을 ‘조계종’으로 변경하는 종헌을 공포했다. 이는 교정체제에서 종정체제로 환원됨을 의미했다. 종명 논란에서 벗어나 교단이 정비될 무렵 불거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논란은 불교계에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성립과 성격’(김광식)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정화 발언으로 명분을 얻은 비구측은 즉각 불교정화추진 발기위원회, 교단정화운동 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했다. 이들은  전국비구승대회를 통해 종조를 보조국사로 하는 종헌을 제정하면서 새로운 종단 구성을 추진했다. 양측은 태고사(비구측은 조계사로 주장)를 두고 폭력사태를 일으키는 등 극심한 갈등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석진 스님은 1954년 11월23일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종단 쇄신책의 일환으로 집행부를 비구 중심으로 구성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전임 집행부가 일괄 사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구측은 석진 총무원장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같은 조치는 비구측이 강조하는 명분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책이자 현실모면의 미봉책(조계종사-조계종 교육원)”이라고 비판했다.

석진 스님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종단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비구측과 종단수습 방안을 논의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비구측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정화를 통한 종단 재건을 선언한 뒤 조계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석진 스님을 비롯한 집행부는 사간동 법륜사로 밀려났다. 이후 양측은 조계사를 두고 끝없는 대립을 이어갔고, 법정 다툼도 지속했다. 석진 스님은 조계사를 재진입하는 과정에서 비구측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뚜렷한 종단수습 방안을 찾지 못하던 스님은 결국 1960년 8월 총무원장을 사임했다.

8년간 이어지던 양측의 갈등은 1962년 4월, 군사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봉합됐다. 석진 스님은 다시 통합종단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통합종단 출범 이후에도 양측은 종단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대처측 추천으로 총무원장에 취임한 석진 스님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다. 스님은 그해 8월20일 비상종회가 통합종단조계종 새 중앙종회의원으로 과반 이상을 비구측으로 뽑자 9월20일 다시 총무원장을 사직했다.

석진 스님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송광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 성북동 청룡암에 머물렀다. 석진 스님은 이미 대처측 인사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남은 삶은 동국대 강의와 집필에 전념했다. 그리곤 1968년 5월13일 “나의 모습은 마음의 그림자요(我相心之影), 그의 형상은 몸의 그림자로다(渠像身之影). 두 그림자 모두 공한 곳에서(兩影俱空處), 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니로라(任性逍遙遊).”는 임종게를 남기고 세연을 접었다. 세납 77세, 법랍 65세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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