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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힌다 스님의 전법성지 미힌탈레

첫 설법 듣고 국왕 귀의…승단 구성으로 스리랑카불교 서막 열어

▲ 미힌탈레 언덕 정상 부근에는 암바스탈레다고바로 불리는 불탑이 조성돼 있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의 사리탑이라 전해진다. 탑 앞에는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데바남피야팃샤왕의 석상이 조성돼 있다.

멀리 하얗게 빛나는 거탑이 보인다면 스리랑카 고대왕국 싱할라왕조의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이주한 ‘사자의 후손’ 위자야가 싱할라왕조의 문을 연 후 그의 후손 판두카바야에 의해 기원전 4세기 수도로 정해진 아누라다푸라는 무려 1400여년 동안이나 싱할라왕조의 심장부였다. ‘불국기’를 남긴 5세기 중국의 법현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옛 기록 속에 아누라다푸라는 아름답고 웅장한, 동시에 불법의 향기가 진하게 스며있는 신성도시로 기록돼 있다.

인도 법왕 아쇼카왕 아들
스리랑카 전법사로 파견
국왕 귀의 후 승단 형성
랑카불교 출발로 평가돼

부처님 재세시 방문 기록
역사서는 명백히 전하지만
수계 있었는지 알 수 없어

“…왕은 성의 북쪽에 있는 자취 위에 큰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장(丈)이었다. 금은으로 치장하였으며 온갖 보배로 합성하였다. 탑 주변에 한 승가람을 세웠는데, 무외산(無畏山)이라고 불렸으며, 500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1채의 불전을 세웠는데, 금은으로 새겨 박았으며 모두 온갖 보배로 꾸몄다. 그 안에는 1개의 청옥상이 있었는데, 높이가 3장(丈)이 되었다. 전신은 칠보로 빛났으며, 위엄있는 모습으로 엄숙하게 나타나서 말로 다할 바가 아니었다. 오른쪽의 손바닥 안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1개의 보배 구슬이 있었다.…”

법현 스님이 언급한 탑과 불전이 정확히 어느 곳을 이야기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 주변의 승가람이 ‘무외산’이라 불렸다는 점에서 아마도 무외산사파의 중심이었던 아브하야기리다고바(Abhayagiri Dagoba)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지금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저 거탑은 높이가 55m에 달하는 루완웰리사야다고바(Ruwanwelisaya Dagoba)다. 고도 아누라다푸라에는 이 탑 말고도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탑들이 산재해 있다. 모두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2000여년에 달하는 오랜 시간을 이겨내고 후대인들의 정성스런 손길 속에 경배 받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아누라다푸라의 오랜 역사를 굽어본 저 탑들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거대한 강물처럼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영광스런 역사의 첫 장을 펼치고자 한다면 아누라다푸라에 들어서기 전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있다. 아누라다푸라로부터 동쪽으로 12km 떨어진 야트막한 바위산 미힌탈레다.

미힌탈레는 ‘마힌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마힌다는 스리랑카불교사의 서막을 연 스님이다. 그보다는 ‘인도의 법왕’으로 불리는 아쇼카왕의 아들이라는 설명이 보다 쉽게 와 닿을 것 같다.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스님에 의한 불교 전래는 스리랑카 고대역사서 ‘마하왐사(Mahavamsa.大史)’에도 등장한다.

인도 아쇼카왕(B.C.E 268~232년 경)은 재위기간 동안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외국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다. 아쇼카의 아들이자 20세에 출가한 마힌다 스님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32살이 되던 해 아홉 번째 전법사가 되어 4명의 장로스님들 그리고 2명의 사미와 함께 스리랑카로 향한다. 마힌다 스님이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바위산 꼭대기다. 물론 하늘을 날아왔다 전해지고 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 하늘을 날아 스리랑카로 건너온 마힌다 스님이 도착한 곳으로 전해지는 미힌탈레 언덕 정상의 바위산. 스리랑카불자들에게 이곳은 불교도래 성지로 여겨진다.

바위산에 도착한 마힌다 스님과 일행들은 이곳에서 며칠간 선정에 든다. 그리고 5월의 보름날 마침내 싱할라왕국을 다스리던 국왕 데바남피야팃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하왐사’는 마힌다 스님과 왕의 만남이 이곳 산신의 주선(?)에 의해서 성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이 머물고 있는 산 정상으로 왕을 이끌기 위해 산신은 아름다운 사슴으로 모습을 바꿔 사냥 나온 왕을 유인했다. 사슴을 좇아 산 정상으로 올라온 왕은 명상에 들어있는 마힌다 스님 일행을 발견한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수행자의 모습에 왕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마힌다 스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왕을 부른다. 그리고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인지’를 묻는 왕의 물음에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두 사람의 일문일답이 이어진다. 마힌다 스님이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먼저 질문을 던진다.

“이 나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나무는 망고라고 불립니다.”
“이 망고나무 말고 또 다른 망고나무가 있습니까?”
“이곳엔 망고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 이 망고나무들 외에 또 다른 나무가 있습니까?”
“망고나무 외에도 다른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망고나무들과 망고 아닌 나무들 외에 또 다른 나무가 있습니까?”
“…이 망고나무가 있을 뿐입니다.”

왕의 대답을 들은 마힌다 스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왕에게는 친척들이 많이 있습니까?”
“예, 친척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친척 외에 사람들이 있습니까?”
“친척 외에도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척과 친척 외의 사람들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직 저 자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의 대답은 흡족스러웠다. 마힌다 스님은 데바남피야팃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간파했다.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이 설해졌고 마힌다 스님의 예상대로 왕은 곧바로 불교에 귀의했다. 왕은 마힌다 스님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해 법회를 열었다. 왕비와 신하, 백성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무려 8500명에 달했다. 왕은 귀족의 자제들을 선발해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게 했다. 마침내 스리랑카에 최초로 여법한 승단이 구성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아쇼카와 데바남피야팃샤가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힌다 스님이 등장하기 전 ‘마하왐사’의 좀 더 앞장을 살펴보자. 데바남피야팃샤는 즉위 후 곧 아쇼카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각종 진귀한 보석이 우호의 선물로 전해졌다. 그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이미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쇼카가 누구인가.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걸출한 인물이었으니 그 이름이 이곳 스리랑카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들이 ‘친구’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때 데바남피야팃샤가 불법의 전래를 요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아쇼카는 데바남피야팃샤의 정성스런 선물에 대한 화답으로 더 귀한 선물을 보냈다. 삼보에 귀의할 것을 권한 것이다.

‘나는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나는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믿음 속에서 우바새의 신분을 권합니다. 또한 삼보에 대한 믿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붓다에 대한 믿음에 귀의하십시오.’

인도의 사신으로부터 아쇼카의 권유를 받은 데바남피야팃샤는 다시 한 번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아쇼카의 전법사, 마힌다 스님이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다. 과정에 대한 기록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마힌다 스님의 전법으로 스리랑카에 비로소 불교가 전해지고 뿌리내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미힌탈레 언덕에 조성된 불상은 마힌다 스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이 이때에 이르러서라 단정하기에는 꺼림칙한 점이 있다.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디파왐사(Dipavam sa. 島史)’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한지 9개월 만에 스리랑카를 처음 방문하셨으며 성도 5년과 8년이 되던 해에 또 다시 이 섬을 방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방문하실 때마다 법을 설하시고 방문의 증표로 머리카락을 전해주시기도 했다.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가 마힌다 스님의 전법보다도 무려 300여년 이상 앞선다는 것이다. 특히 세 번째 방문은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로부터 멀지 않은 켈라니야 지역을 다스리던 당시 왕의 요청에 의해서 이뤄졌으며 왕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수 있도록 백색의자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 전해진 것이 마힌다 스님에 의해서가 아님은 명확한 셈이다.

하지만 왜 학자들은 마힌다 스님의 전법을 스리랑카불교의 출발점으로 볼까. 그것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며 전할 수 있는 주체, 즉 승가의 구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 부처님이 직접 방문하시고 설법하셨지만 가르침을 전하고 수행할 승가가 구성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계를 전했다는 기록도, 출가자가 나왔다는 기록도 없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었지만 승가가 없었다. 그러니 불법은 이어지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불(佛), 법(法,) 승(僧)을 불교의 세 보물이라 칭하는 이유도, 모든 불자들이 불교에 입문하는 첫 걸음으로 ‘삼보에 대한 귀의’를 약속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마힌다 스님의 전법은 곧바로 귀족자제들과 여인들의 출가로 이어졌다. 그 결과 스리랑카 최초로 승단이 구성되었다. 미힌탈레, 마힌다 스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이곳은 그렇기에 부처님의 발자취 못지않게 귀중한 스리랑카의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그 명성에 걸맞게 미힌탈레 주변에는 수많은 불교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아누라다푸라=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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