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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군 진부면 수다사지

기자명 임석규

자장 스님의 오대산 사리신앙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지

▲ 수다사지는 오대산과 강릉 중심의 사굴산문 사리신앙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수다사지 삼층석탑.

영동고속도로 진부 IC로 빠져나와 평창을 향해 남쪽으로 향하는 59번 국도로 접어들면 오대천을 끼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게 된다. 오대천은 동쪽의 두타산과 서쪽의 백석산 사이로 흐르는 하천이며,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진부를 거쳐 남쪽 정선의 조양강과 합류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정암사 건립 이전에 창건

비록 폐사지로 남았지만
발굴 촛대에 1188년 명문

판석 상면 새겨진 연화문
보통의 석탑과 달라 눈길

석탑 표현된 연화좌대는
사리신앙의 조형적 표현

9세기 사굴산문의 스님들
자장, 오대산 개조로 모셔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상
사굴산문 사리신앙 영향

한송사지·월정사를 비롯
오대산과 강릉지역 확산

수다사지(水多寺址)는 진부와 정선을 잇는 오대천변의 수항계곡에 있는데, 이곳에서 오대천을 따라 북쪽 약 20㎞ 거리에 월정사가 있고, 남쪽 20㎞ 거리에서 정선에 닿는다.

수다사는 자장 스님이 월정사와 정암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건립한 사찰로서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자장정율(慈藏定律)조 등에 언급되어 있다. 자장정율조에 따르면 자장 스님은 만년에 강릉(현 평창군 진부면)에 수다사를 짓고 살았는데 이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 석남원(石南院)을 건립하고 기다리지만 끝내 친견에 실패하고 입적하였다. 이때 창건한 석남원은 바로 태백 정암사(淨岩寺)의 전신인데, 이 기록을 통해 정암사 창건 이전에 이미 수다사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월정사의 창건 연기에 의하면, 월정사는 자장 스님이 처음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며, 이후 신효거사와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의 개창주 범일(梵日) 스님의 제자 두타신의(頭陀信義)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수다사의 장로 유연(有緣) 스님이 와서 살아 점차 큰 절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범일 스님의 제자가 월정사의 중창주로 등장하는 것은 오대산신앙과 사굴산문의 융합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사실에서 범일 스님과 오대산신앙의 깊은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범일 스님의 제자 행적(行寂) 스님은 당나라 유학 중 오대산 화엄사를 참배하였으며, 범일 스님의 손제자인 신경(神鏡) 스님도 ‘오대신경’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오대산에 주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 스님부터 제3조인 신경 스님에 이르기까지 사굴산문 초기의 조사들은 오대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및 보살좌상.

수다사는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11세기 전반까지도 높은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13세기에도 사찰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거나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 수다사의 연혁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1987년 이 사지에서 발견된 “대정이십팔년(大定二十八年)”명 청동촛대를 통해 1188년에도 수다사가 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다사지는 일제강점기에도 조사된 바 있다. 당시 절터 안에는 건물의 기둥받침과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었고, 석탑과 3구의 석불,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석탑 이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현재 절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석탑이다. 석탑은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이며,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탑은 탑신을 별도의 판석으로 받치고 있는 점이나 그 판석의 상면에 연화문을 새겨 놓은 점이 보통 석탑과는 달라서 주목된다. 마치 불상의 연화대좌를 연상시키는 부재가 왜 탑에 들어와 있을까? 생각해보면 본래 탑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상 대좌 같은 장치를 기단부에 표현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직접 표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범일 스님이 창건한 강릉 신복사지와 자장 스님과 관계 깊은 평창 월정사, 자장 스님이 창건한 강릉 등명낙가사에 있는 석탑들이 하나같이 연화좌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있어서 이들은 서로 관련이 깊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이 지역은 사리에 대한 신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이었으며 석탑에 표현된 연화대좌는 그 적극적인 사리신앙이 조형적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수다사를 창건했던 자장 스님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자장 스님은 신라에서 재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진골신분 출신이고, 아버지는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으며, 집안은 불교와 돈독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선덕왕의 허락을 받고 출가한 자장 스님은 638년 당나라에 갔다가 643년 귀국하였다. 중국에 있는 동안 자장 스님은 오대산 중대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대의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후 국토의 동북방에 오대산을 설정하고 그곳에 월정사를 창건하였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건립했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은 속초 설악산 봉정암, 평창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 함백산 정암사, 양산 영취산 통도사를 말하며, 이 보궁들에는 모두 자장 스님이 가져온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전한다.

▲ 수다사지 삼층석탑 연화문 받침.

그런데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643년 전후 신라의 상황은 안팎으로 매우 좋지 않았다. 642년 7월, 백제의 의자왕이 친히 신라의 낙동강 서쪽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와 백제의 최전선이었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643년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이 신라의 대당 외교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화성시)을 공격해 당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 하자, 신라는 급히 당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부터 반대했던 세력이 역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당나라 태종을 등에 업고 ‘여왕무위론’이니, ‘여왕폐위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자장 스님은 선덕여왕의 요청을 받아 귀국한 것이다.

귀국 후 자장 스님은 선덕여왕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가며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활발한 정치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스님은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여왕의 권위와 통치력에 새로운 위상을 정립시키려 했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골품[聖骨]’이라 자칭한 신라 왕실은 자신들의 혈통을 석가족의 후예로 연결시키는 찰리종(刹利種) 신화를 만들어냈다. 즉 진평왕(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백정으로 개명)과 마야부인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덕여왕은 석가족의 직계후손이라는 설을 유포하고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645년에는 양산에 통도사를 개창하고, 금강계단을 설치했다. 또 당태종의 반대론에 대해서도 황룡사에 구층탑을 건립할 것을 제안해 호국불교사상을 확고히 세워 나갔다. 결국 자장 스님은 민중을 단결시켜 신라왕실에 협력하기 위해 각지에 호국신앙과 성골신앙의 상징으로써 사리신앙을 확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자장 스님의 사리신앙은 신라왕실을 위한 성골신앙과 관련된 것이었다.

▲ 월정사 적멸보궁.

이제 이야기를 다시 석탑으로 되돌려야 할 것 같다. 9세기 강원도 불교의 맹주였던 사굴산문의 스님들은 오대산 문수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자장 스님을 오대산신앙의 개조로 모시게 된다. 특히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의 제자 행적 스님은 870년에 입당해 오대산 화엄사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은 후 귀국하였고, 귀국 후 태백 정암사에서 입적하는 등 여러 면에서 자장 스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간 듯 보인다. 역시 범일 스님의 제자 개청 스님은 해인사에서 화엄학을 배운 후 범일 스님을 찾아 오대산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스승의 뒤를 잇게 된다. 사굴산문 스님들의 이러한 면면들은 사굴산문과 자장 및 오대산 문수신앙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굴산문은 8세기후반 최성기를 맞았던 중국의 오대산신앙을 받아들여 화엄신앙과 융합시키고, 사굴산문의 사리신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자장 스님을 오대산 신앙의 개조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사굴산문의 사리신앙은 조형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탑신을 연화대좌로 받치고 있는 석탑과 탑 앞에 웅크리고 앉아 양손으로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들고 있는 석조보살상이다. 이런 예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범일 스님이 창건한 강릉시 신복사지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상(10세기경)이다. 탑의 상층 기단 윗면에 연화문을 새겨 놓았는데,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신을 예배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살상은 양식적으로 강릉 한송사지에서 발견된 대리석제 보살상을 계승하면서도 형태는 향로를 받들고 사리를 공양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보살상에 사리공양의 성격을 도입한 새로운 도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평창 월정사에서 볼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형태면에서 팔각형목탑이 다수 건립되었던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탑이다. 고구려계 다각다층탑에 사리신앙을 상징하는 연화문대좌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탑 앞에는 역시 사리공양의 성격을 가진 석조보살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수다사지 석탑 또한 사굴산문의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유형의 석탑이나 석탑 앞에서 향공양을 하는 보살상을 표현한 예는 원주 법천사지나 논산 개태사지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대산과 강릉지역을 시작으로 해 점차 확산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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