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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노파마 ⑤

기자명 김규보

“출가 이레째, 갈애는 멸진되었다”

‘따님께서는 집을 나선 뒤 쉬지 않고 걸어 동이 틀 무렵 승원에 도착하였고, 붓다라는 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발치에 있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였으나 따님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만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곤 단도를 꺼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한 올도 남김이 없어 민머리가 드러났습니다. 그때부터 태양이 중천에 오른 지금껏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하명을 기다립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아노파마
감촉도 소리도 형상도 없어
소식들은 맛자, 딸에게 향해

아노파마가 집을 나선 이튿날 밤, 딸의 소식을 담은 편지가 맛자의 손에 들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하인에게 품삯을 두둑이 쥐어주고 봉인을 뜯었다. 한 줌도 되지 않을 편지 속 딸의 행적은 간결했으며 명료했다. 맛자는 지독하리만큼 길고 모질었던 자신의 지난밤을 떠올렸다. 서늘한 이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머리카락을….’ 짙고 풍성한 다발들이 그의 기억으로부터 자욱하게 흩어져갔다. 어기적거리며 빈 하늘을 휘저어 보았다. 검게 물든 언덕 위로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저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냐.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란 말이냐.’ 맛자는 하인을 불러 글을 받아 적도록 했다.

‘멈추지 말고 주시하라. 매일 글을 보내도록 하라. 필히 돌아올 것이다.’

승원의 아침이 밝았다. 물에 젖은 공기가 가물었던 흙을 촉촉하게 적셨고, 새들은 힘차게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탁발해온 것들을 이고 나르는 소리가 승원 구석구석에 퍼졌다. 굳게 잠겨 있던 아노파마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습기를 머금었고 소리를 들었으며 모습들을 보았다. 아침의 모든 것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람에 쓸린 머리카락들이 주변을 나뒹굴었다. ‘번뇌의 무더기는 흩어졌다. 완전한 깨달음이 멀지 않았다.’

허기를 느낀 아노파마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음식들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적당한 양을 발우에 덜어 걸터앉고는 입 속에 넣었다. 그동안의 호화로운 것들과 사뭇 다른 맛이었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아침 생기에 몸을 맡긴 채 입을 놀렸다. 잘게 쪼개진 음식이 목구멍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갔다. 생명력 주입된 육신이 장작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끝까지 태워버릴 듯한 뜨거움이었다. 다시 한 번 음식을 넣으려던 아노파마가 발우를 내려놓고 승원을 둘러보았다. 아침이슬의 감촉과 새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럽게 오고 갔다. 들고 나가는 그 형상들에 이름을 갖다 붙이고 기뻐하는 자신이 보였다. 집착이었다.

아노파마는 다시 한 번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번에는 감촉도, 소리도, 형상도 없었다. 오직 정적에 쌓여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무상하다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무상하지 못했고, 깨달음을 말하는 순간 더 이상 깨달을 수 없었다. 아노파마는 눈을 떴다. 찰나에 멈춘 시간이 영겁을 흘렀다. 아침이슬의 감촉과 새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이 들고 나갔다. 그러나 그것엔 이제 아무런 이름도 없었다. 승원에 도착한 지 이레째가 되던 날 아침이었다.

“머리를 깎고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지 이레째가 됐다. 모든 족쇄가 끊어졌다. 갈애는 멸진되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맛자의 집으로 달려가 편지를 건넸다. ‘따님이 스스로 불생불사의 문에 들었다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경배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지켜보는 게 무의미합니다. 다음 분부는 무엇입니까.’ 모든 게 명확해졌다. 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와 팔찌, 신발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 불구덩이 속에 던졌다. 메스꺼운 냄새가 그의 집으로 흘러들어갔다. 하인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직접 갈 것이다. 너희 중 둘은 나를 따른다. 나머지는 여차하면 딸이 있는 곳으로 달려올 채비를 하고 있으라.”

맛자는 승원이 있다는 방향을 향해 침을 뱉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간다 딸아. 내 너를 강제로라도 돌려놓을 것이다. 두고 보아라.’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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