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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노파마 ⑥

기자명 김규보

“그래, 별은 항상 저곳에 있었다”

맛자가 승원에 당도한 건 어스름 내릴 무렵이었다. 쉼 없이 내달렸던 하인들은 승원이 보이자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미련한 것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하인들의 안색이 공포에 사로잡힌 듯 창백해졌다. 주인의 얼굴이 사람의 그것보다 짐승의 몰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핏줄 터진 눈에서 분노 서린 안광이 사방으로 튀어나왔고, 피부는 열에 들떠 붉으락푸르락했다.

미소로 자신 맞는 딸에게서
평화롭게 빛나는 별빛 만나
딸 향한 욕망과 집착 벗어나

“딸아. 나오너라. 나와서 보아라. 여기 아비가 왔다.”

맛자가 내지른 괴성이 고요했던 초저녁 승원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혼탁한 음성이었지만, “아노파마”라는 단어만은 선명했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와 승원 입구에 모여들었다.

“아노파마를 찾으러 왔다. 그애는 내 딸이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매어있는 것인지 묻지않겠고 듣고싶은 생각도 없다. 내딸만 돌려받으면 된다.”

저지당하면 한바탕 소동을 벌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맛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순하게 길을 터주자 꽤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얀 것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만 허튼 짓이 보이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맛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하인들 역시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며 뒤따랐다. 안내받은 승원 구석 작은 방 앞에서 맛자의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지난 열흘, 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제 고통을 말끔히 씻어내고 삶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 문 너머에서 그것을 되찾을 것이다.

“아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머리의 낯선 딸과 마주하자 울렁거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곱디곱던 머리카락과 화려한 치장들을 걷어낸 딸의 모습은 생소함 이상의 충격이었다. 자신을 매몰차게 외면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미소로 맞이해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맛자는 해야 할 말을 더듬어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딸을 가진 뒤 지금껏 느껴왔던 온갖 감정들만이 가뭇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게슴츠레 뜬 눈을 간신히 딸에게로 향했다. 아노파마는 평화로웠다. 밟고 올라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맛자에게 그것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욕망하는 것들을 손에 넣고자 발버둥 쳐왔던 맛자에게 그것은 결코 현실이 되어선 안 되는 망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확연해졌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자신을 말없이 받아내고 있는 그것은 엄연한 평화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눈망울이 별빛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불현듯, 별빛을 다신 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아 올라왔다.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품어왔던 익숙한 두려움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던 삶이란 무엇이었던가.

“딸아. 이것이로구나. 네가 떠나던 날까지 바라보았다던 별빛이다.”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보셨습니다. 첫 번째 족쇄가 끊어지려 합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맛자는 방에서 나와 숨을 들이마셨다. 서늘한 공기가 가슴 깊은 곳에 닿더니 이내 몸속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숨을 내쉬자 복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것들이 올라왔다. 궁금했다. 몸의 움직임 따라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는 무언가를 명확히 알고 싶었다. 나무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딸의 눈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었구나. 항상 저곳에 있었어.’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순간 속에 잦아들었던 모든 것들이 불쑥 튀어나와 맛자를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주인님. 언제까지 여기 앉아계실 것인지요.”

하인의 말에도 어떠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잠을 청한 하인이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맛자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태양이 어둠을 거둬내고 있었다. <끝>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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