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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고대불교 - 불교의 전래와 수용 ④ 신라(하)

법흥왕에서 진흥왕으로 이어지며 왕실불교 넘어 국가불교로 발전

▲ 진흥왕대에 궁궐 공사중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지었다는 황룡사의 터.

신라의 불교 공인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 1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법흥왕 15년(528) 이차돈이 흥륜사 창건 공사의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으며, 이어 그 이듬해에 살생(殺生)을 금하는 영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사기’ 편찬 때에 신라본기 법흥왕조의 기년(즉위칭원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1년의 착오가 발생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최치원 찬술의 ‘봉암사지증대사비’ 및 김부식 찬술의 ‘영통사대각국사비’ 등의 자료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법흥왕 14년(527)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리고 이차돈이 순교하자 흥륜사 공사는 중단되고, 법흥왕 22년(535, 을묘년)에 가서야 공사를 재개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실제적인 불교공인은 법흥왕 22년으로 보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
불교 공인 관련해 1년 차이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했기 때문 추정

법흥왕 14년 이차돈 순교로
불교공인 되고 왕권도 강화

법흥왕은 흥륜사 완성되자
‘법공’이란 법명 받고 출가

임금의 출가는 ‘사신’ 행위로
사찰에 몸값 치르고 모셔 와

법흥왕에 이어서 진흥왕도
말년에 출가해 ‘법운’ 칭해

진흥왕은 양나라와 교류해
불사리를 모셔와 불탑 세워

황룡사와 구층목탑을 지어
호국불교 상징 삼보를 완성

그런데 1970년에 발견된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바위에 새겨진 신라시대의 글에 의하면 법흥왕 22년의 재개 공사 이전에 이미 흥륜사는 물론 소속 승려까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전리서석 갑인명에 “갑인년에 대왕사의 안장이 짓다(甲寅年大王寺中安藏許作)”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갑인년은 법흥왕 21년(534)으로 흥륜사 공사를 재개하기 1년전이다. 그리고 대왕사는 곧 흥륜사로서 진흥왕 때 흥륜사가 완성되자 ‘대왕흥륜사’라고 하였다. 또한 안장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진흥왕 11년(550) 대서성(大書省)으로 임명된 승려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다음에 같은 천전리서석의 을묘명에는 “을묘년에 8월4일 성법흥대왕 때에 도인 비구승 안급이와 사미승 수내지, 거지벌촌의 중사 ○인들이 (서석곡을) 보고 쓰다.(乙卯年八月四日聖法興大王節道人安及以沙彌僧首乃至居智伐村衆士○人等見記)”라는 글귀도 보이는데,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었다는 법흥왕 22년(535, 을묘년)에 이미 법흥왕은 초월적인 지위를 의미하는 대왕을 칭하였으며, 아울러 비구와 사미승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불교공인이 이뤄져 살생을 금하는 왕명이 내리게 되었으며, 왕권의 강화에 수반되어 법흥왕 22년 흥륜사 공사는 대대적으로 재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서는 “법흥왕은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스님 옷을 입고 법공(法空)이라 이름 하였으며, 왕족을 바치어 절의 노예로 삼았다”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표현 그대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신(捨身)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학계의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제왕의 사신이란 잠시 정사를 쉬고 절에 들어가서 삼보의 노예가 되는 의식인데, 이때 조정에서는 노예가 된 제왕의 몸값을 치르고 모셔오게 됨으로써 절에서는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법흥왕은 22년(535) 불교를 일으킨 임금이라는 의미의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고 자칭하면서 흥륜사 공사를 재개하였으며, 이어 다음해인 23년(536)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칭하였는데, 새로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법흥왕의 연호 제정은 왕 위상의 변화, 국가의 발전과 연관된 것이겠지만, 한편 불교를 통한 왕 자신의 심경의 변화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법흥왕의 불교공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양(梁)의 보살황제 무제는 사신을 특히 많이 한 제왕으로 유명한데, 그는 사신할 때마다 신앙심이 그만큼 깊어지고 불교를 지원함으로써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려는 취지에서 연호를 새로 제정하여 무려 여섯 번이나 고쳤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신라불교의 기틀을 다진 진흥왕도 왕위에 있는 동안 세 번이나 연호를 바꾸었다. 진흥왕 12년(551)의 ‘개국(開國)’, 29년(568)의 ‘대창(大昌)’, 33년(572)의 ‘홍제(弘濟)’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즉위 12년에 개국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은 즉위 초기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던 진흥왕이 친정(親政)을 통해 새로이 나라를 연다는 의미에서 택한 것으로 보이나, 그 뒤 두 번의 연호 개정의 이유는 불명이다. 진흥왕도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말년에 스님이 되어 법운(法雲)이라고 칭하였고, 그 부인도 또한 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을 보아 몇 번의 사신 행위가 있었으며, 그 시기가 바로 개원한 때였다고 추정된다. 법흥왕의 사신은 흥륜사에서 행해진데 반해 진흥왕의 그것은 27년(566)년에 준공된 황룡사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본다.

신라불교를 일으킨 법흥왕이 재위 27년 만에 돌아가자, 그의 조카 진흥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법흥왕은 자식이 없고, 그의 아우 입종(立宗)도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입종의 아들인 삼맥종(彡麥宗, 사미의 뜻)에게로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따라서 얼마 동안은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이 섭정을 하였다. 진흥왕은 전왕의 봉불사업을 이어 5년(544) 2월에 흥륜사를 준공하고, 이어 다음 달 흥륜사 낙성의 기념으로 나라 사람들에게 승니(僧尼)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불교는 왕실불교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불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나라의 사신 심호(沈湖)가 유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옴에 왕이 백관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신라불교는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대의 초기불교에 양나라 불교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유학승 각덕의 귀국은 ‘서학(西學)’이라 하여 중국문화 수입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선례가 되었으며, 뒤의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는 원광(圓光)도 서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불사리가 들어와 불탑을 세우게 됨으로써 비로소 부처를 모시는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진흥왕 11년(550)에는 안장을 대서성으로 삼고 소서성도 두 사람 두었는데, 대서성은 무슨 일을 맡았던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명칭이나 후대 임명의 사례로 보아 교단통제 기구 안에 속하였던 승직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국정 자문이나 외교문서 작성 등 국가의 정교(政敎)에 관여하는 승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혜량(惠亮)을 국통(國統)에 임명하여 불교제반사를 통관하게 하는 승관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혜량에 의해 신라에서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가 행하여지게 되었다. 혜량을 영접한 사람은 거칠부였는데, 그는 진흥왕 6년(545)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뒷날 신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혜량은 일찍이 스님으로 가장하여 고구려에 잠입하였던 거칠부를 구해준 인연이 있었으며, 고구려 귀족들의 내분을 틈타서 신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진흥왕 14년(553)에는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닦던 중 황룡이 나타나는 이적으로 인해 궁궐 대신 사찰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신라 국가의 발전에 따라 방어 위주의 월성에서 중앙의 평지로 궁궐을 옮기려고 하였던 것인데, 처음의 계획을 바꿔 그 자리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은 불교를 왕권강화와 국가통합의 중심이념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국가불교의 중심사찰인 황룡사의 공사는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에 담장을 쌓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오늘날 발굴을 통해 드러난 황룡사의 규모는 주요 건물터만도 8800평으로 불국사보다 8배나 큰 사찰이었다. 그리고 진흥왕 35년(574)에는 황룡사 장륙삼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인도의 아육왕(阿育王, Aśoka)이 보낸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이러한 장륙존상 조성의 연기설화는 인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고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아쇼카왕 같은 위대한 제왕이 되기를 바랐던 진흥왕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 진흥왕은 아들들의 이름을 금륜(金輪, 또는 舍輪-鐵輪)과 동륜(銅輪)으로 지어 전륜성왕의 염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최근 발견되어 위서로 판명된 ‘화랑세기’에는 진흥왕의 딸 가운데 은륜(銀輪)공주가 있어서 금·은·동·철의 4종의 전륜성왕의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진흥왕 26년(565)에는 진(陳)나라의 사신 유사(劉思)가 승려 명관(明觀)과 함께 경론 1700여 권을 가져왔다. 이보다 40여 년 뒤에 중국에서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편찬 당시 한역된 불전의 숫자가 모두 3325권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과반수 이상이 신라에 들어온 셈이다. 그 이듬해(566)에는 황룡사의 공사가 거의 완성되었으며, 또한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지난해에 가져온 불경을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의 불교교학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579〜632)은 그 이름이 석가의 아버지 이름과 같은 백정(白淨), 또는 백반(白飯)이며, 그 부인의 이름도 석가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고 한 바와 같이 석가의 가족의 이름을 끌어다가 왕실의 신성성을 높이려고 기도하였다. 진평왕대는 특히 중국에 유학승들을 파견하여 불교의 질적 수준을 높이었다. 왕 7년(585) 7월에는 고승 지명(智明)을 진에 보냈고, 다시 11년(589) 3월에는 원광(圓光)을 파견하여 22년(600)에 귀국케 했으며, 18년(596) 3월에는 담육(曇育)을 수(隋)에 보내어 27년(605)에 귀국케 하였다. 또한 23년(601)에는 안함(安含, 安弘과 동일인)을 수에 보내어 27년(605)에 귀국케 하였다. 선덕여왕 7년(638) 당에 유학을 갔던 자장(慈藏)을 12년(643) 귀국시켜 계율을 정비하고 불교교단을 통제하게 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3년(634)에 분황사(芬皇寺), 다음해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창건하고, 마침내 14년(645)에는 자장의 발원에 따라 황룡사의 구층탑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황룡사의 장륙존상 ·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중고기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삼보(三寶)가 완성되었다. 신라 중고기의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원광 · 안함 · 자장의 역할은 국가발전과 불교편에서 상술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29호 / 2018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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