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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무엇이 평화인가

기자명 최원형

올림픽 끝나면 가리왕산에 야생화 피어날까?

나는 한때 스포츠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경쟁에 집착하는 스포츠가 부담스러워졌다. 경쟁에 이겨야만 인정받고 기대에 못 미치면 매국노 취급받는 문화에 거부감이 들다가 자연스레 스포츠와 멀어졌다. 결과만을 중시하다보니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는 아무리 사력을 다하고 자기 기록을 경신해도 죄인처럼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메달도 최고 메달이 아니면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였고 애석하다느니 하는 수식어가 붙었다. 스포츠맨십이라며 넘어진 선수를 일으켜주는 미담은 정말 어쩌다 등장할 뿐, 선수도 관중도 기록과 등수가 적힌 전광판 숫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그런 스포츠가 영 마뜩잖았다. 생각해보면 이번 경쟁에 이겼다 해도 영원한 승자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경쟁은 관계를 피폐하게 만들지만 협력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경쟁에 집착하는 걸까? 거머쥔 메달 그 자체보다 메달에 따라오는 여러 보상들 때문에 그토록 경쟁에 목을 매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림픽 휴일 같던 설 연휴기간
스켈레톤 트랙보며 당혹감느껴
경기위해 500년 지켜온 숲 파괴
생명 짓밟고 평화 염원한 모순

올해 설 연휴는 명절이라기보다 올림픽 휴일 같았다. 연휴 기간 동안 나는 어쩐 일인지 컬링이라는 무척 낯선 스포츠를 친숙하게 봤다. 출전한 우리 선수들이 야무지고 재미나게 경기한데다 한 동네 언니 동생들로 이루어진 팀이어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들은 경쟁을 한다기보다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누구야 기다려’, 이런 말들이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들리는데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랑 편을 갈라 비석치기하며 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설날 아침에는 스켈레톤 경기가 있었는데 마침 윤성빈 선수가 신기록을 연달아 세우는 중이었다. 맨몸으로 썰매에 엎드린 채 속도 경쟁을 벌이는 경기여서 혹시라도 다칠까 잔뜩 긴장하며 봤다. 그러다 카메라가 스켈레톤 트랙 전체를 비추는데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완전한 민둥산에 트랙만 구불거리고 있었다. 지형으로 봐선 틀림없는 산인데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은 민둥산이 그곳에 있었다. 재빨리 카메라는 다음 선수를 비추고 있었지만 내 뇌리에서는 그 민둥산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넋 놓고 경기에 몰두하던 나는 뭔가 크게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새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리고 보니 길게 슬로프가 내려오며 알파인 경기가 벌어지는 곳은 가리왕산이었다. 가리왕산은 1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면서도 다양한 식물들이 살던 곳이었다. 침엽수 활엽수가 고르게 많은 산이었다. 주목이 산다는 산을 들여다보면 대개 큰 나무만 살고 어린 나무는 거의 볼 수가 없는데 가리왕산은 달랐다. 어린 나무부터 고목까지 다양한 생애의 나무들이 살고 있는 산이었다. 오백년을 지켜온 숲이었다. 그랬던 산의 나무들이 단 며칠 동안 이용할 스키 슬로프를 만드느라 무참히 학살당했다. 단지 나무가 베어지는 걸로 끝이었을까? 빙상경기에 얼음과 눈이 빠질 수 없고 그러기 위해선 물이 필수였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는 15개 종목에 3천여명 가까운 선수가 출전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먹고 마시고 씻는 물은 제외하더라도 많은 종목의 경기를 위해 얼리고 만드는데 들어갔을 물의 양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그리고 그 많은 물은 어디서 왔을까? 나무들이 땅 아래 모아두었던 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이 준 것을 고스란히 꺼내 쓰면서도 10만 그루 가까운 나무를 베어 버렸다. 올림픽이 끝나면 복원할 거라지만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생명이 있든 없든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 그런 관계가 바로 생태계 아닌가. 망가뜨린 뒤 다시 외형만 같게 만든다고 복원이라 할 수 있을까?

이번 올림픽은 스포츠 이전에 정치였던 것 같다. 현재 한반도의 정치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한 긴장상태다.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 사이의 기류는 마치 조선말의 상황이 되살아난 듯 기시감이 들 정도다. 이 와중에 남북이 단일팀이 됐다. 함께 입장하고 북에서 공연단과 최고 권력의 피붙이까지 찾아든 이번 올림픽을 보며 사람들은 평화를 염원했다. 평화, 참 좋은 말이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그 평화올림픽에 가리왕산이 제물로 받쳐졌다. 생명들의 평화를 무참히 짓밟은 그 자리에서 평화를 염원하다니. 올림픽이 끝나는 3월에 그곳에서 야생화 꽃대를 볼 수는 있을지 우려스럽다.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관계는 끝내 연결된 모든 관계를 망가뜨리고 만다. 자연과 우리 사이에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참회의 마음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가벼운 후회와 반성만으론 어림도 없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29호 / 2018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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