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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타차라 ②

기자명 김규보

“성년이 되면 아버지 뜻대로 안 될거야”

“딸아. 너는 커서 나랏일을 하거나 재력 있는 집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래서 평생 남편을 봉양하며 살아야 해. 알겠느냐?”
“아빠, 나랏일이 뭐고 재력이 뭐야? 봉양?”
“차차 일러주도록 하마. 지금은 이 아비 말을 명심하기만 하면 된다.”

옹알이를 끝내고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파타차라는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에 대해선 남자와 여자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라고 얼핏 알긴 했다. 하지만 나랏일이니, 재력이니 하는 말은 어린 파타차라에겐 어렵기만 했다. ‘그래도 아빠 말이니 꼭 그렇게 할 거야.’ 가물거리는 파타차라의 옛 기억 속 꼬마는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파타차라의 아버지가 쌓은 부는 막대했다. 사위성에서 바이샤 계급으로 태어나 장사를 업으로 삼고 일찍부터 시장바닥에 뛰어들었다. 재리(財利) 흐름을 예상하는 능력을 타고난 덕에 매점매석의 수완을 발휘했고, 스무 살 남짓에 거부로 이름을 떨쳤다. 철저하게 독점 방식으로만 사고팔았으니 돈이 돈을 물고 굴러들어오는 꼴이었다. 그는 넘치는 돈을 옷과 음식, 집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는데 가장 정성 들인 것은 집이었다. 딸이 태어날 즈음, 눈여겨봤던 구역의 집들을 모조리 사들인 뒤 통째로 허물고 거대한 저택을 세웠다. 특히 딸이 머물 집은 사위성 어디에서도 보일 만큼 높게 지었다.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볼 때마다 “생각이 있다”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파타차라의 어릴 때 기억은 그런 아버지에게 결혼 이야기를 들은 것을 제외하면 방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전부였다. 하인들이 방으로 가져온 음식을 먹고 옷을 입었으며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다 어둑해지면 잠이 들곤 했다. 단조로운 생활이었지만, 당시엔 단조로운지 몰랐고 오히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열 살 즈음이었을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을 보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아버지 뒤에 숨어 있다 집 가까이 도착해서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며칠 지난 후 하인 한 명을 붙잡고 사람들이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는지 물었다.

“예뻐서 그래요. 바깥에서 사람들이 아가씨를 보고 뭐라는지 아세요? 사위성 최고 미인이래요. 잠시 바깥에 나가셨을 때 남자들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아가씨와 결혼하겠다는 남자도 한둘이 아니에요.”

자신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누구에게도 예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놀란 표정의 파타차라에게 하인은 또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가씨가 방에서만 생활하는 건 주인님 뜻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크샤트리아 계급 남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진즉부터 가지고 계셨어요.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계급을 살 순 없거든요. 아가씨가 왕자랑 결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주인님은 머잖아 왕의 장인이 되는 거죠.”

파타차라는 배신감과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나. 방에 가두다시피 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나. 외출하고 돌아온 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가장 높은 층으로 방을 옮기라고 명령한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감을 골라 결혼을 성사시키기 전까지 세상과 철저하게 격리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영원히 떨쳐내지 못할 멍에가 목을 조르고 있음을 느꼈다. 계급으로 높낮이를 결정짓는 제도와 그를 추종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구역질을 간신히 아래로 집어넣으며 하인에게 말했다.

“성년이 되려면 몇년 남았으니 당분간은 이방에서 생활하겠어. 먹으라는 대로 먹을 테고 입으라는 대로 입을 테야. 하지만 성년이 된 이후엔 아버지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야. 꼭 지켜야 해.”
파타차라가 하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감한 표정의 하인이 이내 웃음 지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파타차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0호 / 2018년 3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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