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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9대 총무원장 경산 스님-상

종단중흥 원력 세웠지만 ‘종정중심제’ 난관에 번번이 좌절

 

1979년 12월25일 조계종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조계사·개운사 총무원으로 나뉜 조계종에서 조계사측 총무원장을 맡았던 경산 스님이 이날 새벽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돌연 입적했다. 스님은 한 달 전 총무원장에 선출돼 “2개월 내에 종단을 수습하겠다”며 종단분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갑작스런 뇌출혈로 뜻을 접어야 했다.

청담스님 등과 불교정화 앞장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
비구측 첫 총무원장으로 ‘실세’

비구·대처 갈등해결 나섰지만
‘화동 협정’ 결렬로 끝내 무산
종정 청담 스님과의 갈등 빌미
1967년 청담 종정과 동반퇴진

‘대한불교(1980년 1월20일자)’에 따르면 경산 스님의 영결식은 1979년 12월29일 조계사에서 엄수됐다. 종단장으로 봉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종정 고암 스님을 비롯해 스님과 신도, 각계 인사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종단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갈등했던 개운사측 종정 직무대행 월하 스님과 종회의장 월주 스님 등도 장례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장례위원장 월산 스님(조계사측 종회의장)은 “정화의 선봉으로 교단정립에 초석이었던 스님의 가심을 무슨 말과 글로 위로하겠느냐”며 “육신은 세연을 다하여 우리 곁을 떠났지만 스님의 유법(遺法)은 항상 이 산하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벽암 스님도 “종단 중흥의 원력보살이었던 스님의 가심이 애절하지만 위대한 원력은 교단의 지표가 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경산 스님은 근현대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청담 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에 앞장섰으며 통합종단조계종의 산파 역할을 했다. 통합종단 출범 이후 중앙종회 부의장, 총무원 교무·총무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9년 입적할 때까지 3번에 걸쳐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첫 번째 총무원장은 청담 종정과의 갈등으로, 두 번째 총무원장은 서옹 종정과의 갈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1979년 조계사와 개운사로 양분된 종단 상황 속에서 다시 조계사측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지만, 병마로 임기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입적한 불운의 인물이었다. 이후 종단분규 수습과정에서 개운사측이 정통성을 얻으면서 경산 스님의 세 번째 총무원장은 조계종사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경산 스님은 1917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해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유점사에서 4년간 수학하며 대교과를 수료했고, 194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조계종사’에 따르면 동산 스님은 1934년 수좌들이 설립한 조선불교선종의 초대 교무부장을 역임했고, 1941년 3월 ‘청정승풍 진작과 계율수호’를 위해 선학원에서 ‘유교법회’를 개최한 청정비구 3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동산 스님과의 인연은 경산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불교정화운동이 촉발되자, 경산 스님은 그 중심에 섰다. 1955년 1월 효봉·인암·청담·월하 스님과 함께 비구측 대표로 불교정화대책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그해 8월 비구측이 주도한 승려대회를 통해 종회의원에 선출됐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의 토대를 다졌던 불교재건위원회에 비구측 15인 대표로 참여했고, 같은 해 8월 통합종단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돼 차석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경산 스님이 통합종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65년 3월 구성된 화동위원회에서 종단 대표로 나서게 되면서부터다. 이 무렵 통합종단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962년 4월11일 조계사(비구)와 법륜사(대처)측의 합의로 통합종단이 출범했지만, 8월20일 불교재건비상종회가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조계사측에서 32명, 법륜사측에서 18명을 선출하자 이에 반발한 법륜사측이 통합종단에서 이탈하면서 분규가 재연됐다. 법륜사측은 서울 서대문에 또 다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으며 조계사측을 상대로 ‘종헌 무효 및 효봉 조계종정 불인정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전국의 사찰에서도 소유권과 관련한 소송과 물리적 공방이 이어졌다. 양측의 치열한 대립은 불교계 전체의 혼란과 재산손실을 가져왔다.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1964년 총무원 1년 예산 962만5000원 가운데 소송비로만 40만원이 책정됐다. 당시 조계종이 종단재건을 위해 추진한 3대 핵심사업 가운데 하나인 교육비(도제양성)가 97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다. 마땅한 수입원이 없었던 조계종은 사찰의 유휴 토지 등 기본재산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충당했다. ‘삼보정재를 처분해 소송비로 날렸다’는 비판이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965년 3월16일 양측은 ‘대한불교조계종 화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불교정화운동과 화동위원회’(김광식)에 따르면 조계종 총무부장 경산 스님과 서대문측(대처) 종원 스님(백양사 주지) 등 양측 대표 8명은 ‘비구와 대처라는 명분론적 차별에서 벗어나 대동단결할 것’에 뜻을 모았다. ‘종조를 도의국사로 하고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을 거쳐 만암 대종사를 중흥조로 한다’ ‘대승정신에 입각해 종회와 중앙기관을 개편한다’ 등을 담은 화동약정서도 체결했다. 경산 스님은 이를 1965년 3월25일 제9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보고하고 “종헌종법에 위배되지 않는 원칙에서 화동활동을 추인한다”는 조건부 승인도 얻어냈다. 이로 인해 양측에 ‘화동’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1965년 6월11일 서울민사지법이 서대문측이 제기한 ‘종헌 무효 및 효봉 조계종정 불인정 확인’소송에서 서대문측의 승소를 결정했다. 조계종 중앙종회는 서울고법에 즉각 항소하고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화해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됐고, 화동위원회 활동도 정체됐다.

화동위원회 활동이 다시 탄력을 받은 것은 1966년 3월 제12회 임시회에서 2대 총무원장 법룡 스님 후임에 경산 스님이 선출되면서부터다.
 

▲ 경산 스님은 1965년 3월 통합종단에서 이탈한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 화동원칙을 밝혔다. ‘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대처측 인사로 종단 내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전임 총무원장과 달리 경산 스님은 비구 출신으로 종단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실세’ 총무원장이었다. 경산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정체됐던 화동위원회 활동을 재개했다. ‘제1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1966년 5월부터 양측은 3개월간 협의를 진행하고, 양측에서 제기한 소송을 모두 취하하는 대신 화동의 방식으로 종회의원 의석수를 재조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계종측은 그해 8월 제13회 임시중앙종회에 보고했고, 중앙종회는 논란 끝에 18대 16으로 ‘화동약정’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1967년 2월6일 조계종과 서대문측 중진스님 40명은 아서원(중국음식점)에서 만나 ‘비구·대처의 분쟁을 종결하고 통합종단을 재확인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중앙종회의원 50명 가운데 서대문측에 21명을 할애하고, 23개 본사 가운데 8곳을 서대문측에 배분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에 대해 김광식은 ‘불교정화운동과 화동위원회’에서 “조계종단으로서는 본사 및 종회의원을 양보한 대가로 전라도 지역의 미등록 사찰을 종단으로 등록케 하고, 각처의 분규가 해소되고 통합종단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올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화동협정 체결로 10여년 넘게 지속된 비구·대처 갈등도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화동협정 결과에 대해 서대문측 총무원은 강하게 반발했다. 협정을 체결한 종원 스님은 서대문측의 대표로 볼 수 없으며, 화동협정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서대문측은 “조계종측과의 통합은 불가하고 종단을 분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비구·대처간 화동통합 논의는 서대문측에서 이탈한 일부 스님들이 조계종에 합류하는 선에서 일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동파의 합류는 이후 조계종에서 새로운 내분의 불씨가 됐다.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과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의 상징으로, 1963년 6월 제4회 임시종회에서 벽안 스님에 이어 종회의장에 올라 종단의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조계종 종헌은 ‘종정중심제’를 골자로 했다. 종정이 종단의 대표권을 가지며 본말사 주지를 비롯한 각종 인사권도 가졌다. 이는 통합종단 출범과정에서 대처측이 맡게 된 총무원장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한 비구측의 포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납 75세의 노령에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오른 효봉 스님은 자신에게 부여된 대부분의 권한을 사실상 중앙종회에 위임했다. 종단의 주요현안을 비롯해 총무원 간부 등에 대한 인사권도 모두 중앙종회에서 결정됐다. ‘종정중심제’는 명목일 뿐 ‘중앙종회중심제’였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1966년 10월15일 효봉 스님이 입적하자 중앙종회는 11월30일 제14회 정기중앙종회를 열어 2대 종정으로 청담 스님을 추대했다. ‘동아일보’(1966년 12월1일자)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종정에 추대되자 “현대인을 지도할 수 있는 승려를 육성하고, 하루빨리 불교정화를 꼭 이루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종헌에 보장된 종정권한을 활용해 종단 운영에 직접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실세 총무원장으로 불렸던 경산 스님과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종단 내 두 실력자의 충돌은 1967년 7월25일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불거졌다. ‘대한불교’(1967년 7월30일자)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중앙종회에 앞서 7월23일 열린 종단중진회의에서 “현재 종단 실정은 난국”이라고 규정하고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 사퇴를 요구한 표면적 이유는 경산 스님이 동국대 재단이사장과 총무원장 재직 당시 진 빚 4170만원에 대한 문책이었다. 또 “현 종헌종법은 ‘종정책임제’로 되어 있으니 종정이 새로 추대되었으면 당연히 종정 뜻을 받들 사람으로 원장을 임명하여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종단중진회의에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원장에서 물러날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결국 종단중진회의는 총무원장의 유임을 결정하고, 종정 청담 스님에게 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청담 스님은 “여러분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소. 나는 전국 남녀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포교나 하겠다”며 종정사직원을 종회의장에게 제출했다. 결국 중앙종회는 종정과 총무원장에 대한 사표수리여부를 묻고 표결(사표수리 22표, 사표보류 20표, 기권1표) 끝에 가결했다. 또 3대 종정에 고암, 4대 총무원장에 기종(영암) 스님을 선출했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동반사퇴는 표면적으로 경산 스님의 채무로 불거졌지만, 이면에는 경산 스님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화동파’ 유입에 대한 청담 스님의 노골적인 불만표출이라는 시각도 있다.

청담 종정과 경산 총무원장의 갈등은 1970~80년대 조계종 내분을 초래한 ‘종정·총무원장 중심제’ 논란의 서막이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31호 / 2018년 3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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