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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타차라 ③

기자명 김규보

“아이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겠어”

파타차라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호화로운 음식과 옷이 매일 방으로 배달됐고, 파타차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순순히 먹고 입었다. 부모를 대하는 것 또한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꼭대기 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올 때마다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이따금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고분고분한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늘 흡족히 웃으며 방을 나가곤 했다. 파타차라의 의도대로였다.

아버지 원망하며 다 버리고
세상과 타협 않겠다 했지만
가난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

“주인님께서 아가씨의 남편감을 고르셨어요. 높은 계급에 재물도 주인님이 가지고 계신 것만큼 많은 집안 자제예요. 날짜가 결정되면 일이 순식간에 진행될 거예요. 아가씨가 예전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성년이 되면 아버지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요. 어떡하시겠어요?”

성년이 될 즈음, 유일한 말벗이던 하인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태어나는 순간 계급을 부여하고 숙명 따위로 포장하는 세상이 역겨웠다. 자식 결혼에 계급의 잣대를 들이대고 저울질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부족함 모르고 자란 자신조차 이렇게 괴로운데, 하물며 천시당하고 배곯는 대다수 삶은 어떠할지. 세상을 바꾸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세상과 타협하진 않으리라. 그때가 되면 집을 나서겠다는 다짐을 수천 번 곱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하지만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파타차라는 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지할 곳 없던 마음을 다잡아준 그였다. 언제부턴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의 얼굴이 벌그스름해진 것도 같았다. 생각에 잠겼던 파타차라가 입을 뗐다.

“아버지가 정해주신 혼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싫대도 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집을 나가겠어.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 나와 같이 가지 않겠어?”

그날 밤, 파타차라는 숨겨두었던 누더기로 갈아입었다. 하인이 방으로 들어와 파타차라의 손을 잡았다.

“세상은 아가씨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거예요. 궁궐 같은 집도 풍족한 재물도 더 이상 아가씨를 보호해주지 못할 테니까요.” 파타차라가 몸을 떨었다. 모질게 마음먹었다 믿어왔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두려움이 앞섰다. “준비됐겠죠. 갑니다.” 계단을 내려와 부모가 기거하는 건물을 거쳐 대문에 당도했다. 이제 망설임은 의미가 없다. 파타차라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둘은 부부의 연을 맺고 사위성에서 멀리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에 정착했다. 몇 해 전, 첫 번째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파타차라의 마음은 나날이 여위어갔다. 남편은 언제나 자상하고 책임감도 남달랐지만 살림살이는 당장 저녁거리를 걱정해야 할 만큼 궁색했다. 파타차라에게 빈궁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돌아보면, 주는 대로 받아왔던 어렸을 적 생활과 세상에 대한 원망 사이엔 어떠한 연결점도 없었다. 재물은 재물대로 거머쥐고 원망은 원망대로 쌓아왔을 뿐이었다. 파타차라는 집을 나왔을 때 자신이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급을 이유로 결정된 결혼이기에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아버지에게 먼저 밝혔어야 했다. 그때 스스로 옳다고 믿었다면, 진노했을 아버지를 설득해보겠다고 마음먹었어야 했다. 파타차라는 모질게 후회했다. 그렇더라도 지금 현재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아보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후회와 미련은 파타차라를 갉아먹는 독이 되고 말았다.

파타차라의 배가 또 한 번 불러왔다. 둘째였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우리 아이들이 이런 집에서 생활하게 할 순 없어. 저기 삐쩍 마른 큰애를 봐. 뱃속 둘째도 저렇게 될 거야.” 파타차라가 절규하듯 말했다. 잠잠히 듣고 있던 남편이 대답했다.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가야겠지.” 이튿날, 파타차라는 아이를 둘러메고 5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비극이 시작되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1호 / 2018년 3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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