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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⑤ 가야-상

허왕후 관련 남방 전래설은 후대 창작된 연기설화

▲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싣고 왔다고 전해지는 김해 파사석탑(婆娑石塔).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고대국가 가운데 문헌 자료가 가장 적게 남아있는 국가가 가야이다. 따라서 불교전래에 대해서도 자료가 극히 미비하여 그 전반적인 실상은 알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駕落國記)’와 ‘파사석탑조(婆娑石塔條)’의 내용 가운데서 가야의 건국신화의 형태로 불교전래 사실이 전하고 있으며, 고고학 자료로는 고령지역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연꽃무늬를 통해 불교전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가야 관련 불교전래 기록
‘삼국유사’ 극히 일부 전해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시집오며 불교도 들어와

파사석탑 등 몇 가지 유물
인도 전래설 근거로 부족

본가야 8대 질지왕 때에
불교 공인하며 절도 지어

5세기 중반 대가야 두각
남제 학문불교 영향 받아

가야금이란 악기 만들며
우륵에게 12곡 작곡케 해

나라 지명 딴 곡들이지만
2곡은 불교적 성격의 노래

오늘날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했다는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가야불교의 전래과정에 대한 해석은 실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해양을 통해 인도에서 직접 수입된 것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는 학자들이 있으며, 또한 태국의 아유타이나 중국의 보주(普州, 四川省 安岳縣)를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특히 보주는 허황후가 뒷날 보주태후(普州太后)로 칭해지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인도로부터의 직수입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1999년 아유타국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소도시 아요디아의 왕실 종손을 초청하여 김해 김수로왕의 대제에 참석시키기도 했으며, 나아가 2001년에 김해시는 아요디아시(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현지에 허황후 기념공원까지 조성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가야의 건국신화 내용의 사실성과 용어들을 엄밀하게 검토하여 인도로부터의 직접적인 전래 가능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한 예를 들면 인도 출신학자인 판카즈 모한(Pankaj Mohan)은 “남방불교 전래설은 가야 출신으로 삼국통일전쟁을 이끌었던 김유신의 세력이 가야왕실의 위상을 제고하며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든 신화적인 역사(myth-history) 내지 날조된 전통(invented tradition)”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도 아직 가설의 단계를 벗어난 것은 못되지만,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가야의 불교전래설을 해석하는 방법으로서는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건국신화가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신화는 기본적으로 그 신화를 창출하고 전승시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판카즈 모한의 견해는 유의할만한 가치가 있다.

가야가 위치한 낙동강 하류 지방에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의하면 원래 12개의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3세기경 이들은 진왕(辰王)의 지배를 받지 않고 연맹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구야국(狗邪國)과 반로국(半路國, 半破國) 등이 대표적인 소국이었다. 구야국은 수로를 시조로 받들고 본가야(本加耶, 駕洛國)로 발전하여 이 지방의 다른 여러 소국들과 연합하여 전기(前期)의 가야연맹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반로국은 이진아시(伊珍阿豉)를 시조로 받들고 대가야(大加耶)로 발전하여 본가야의 뒤를 이어 여러 소국들과 연합하여 후기(後期)의 가야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는 2~3세기경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전기의 가야연맹의 맹주가 되었으며, 활발히 해상활동을 하여 서해안으로는 낙랑·대방 등 한군현(漢郡縣), 동해안으로는 예(濊), 그리고 남으로는 왜(倭)와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왜의 군대를 끌어들여 가야를 거쳐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와 가야의 관계는 날카로운 대립을 이루게 되었고, 급기야는 400년경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파병을 초래하여 본가야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본가야는 ‘가락국기’에 의하면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구형왕(仇衡王)까지 10대 491년을 이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각 왕의 재위시기에서 같은 ‘삼국유사’ 소재의 ‘왕력(王曆)’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또한 1대 시조부터 5대 이시품왕(伊尸品王)까지 각 왕의 평균 재위 연수가 73.2세가 되어 역사적 사실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신빙할 수 있는 연대는 6대 좌지왕(坐知王, 407~421) 때부터인데, 이 왕대에 외척세력을 제거하는 정치개혁을 통해 본가야의 부흥을 모색하였으며, 이어 8대 질지왕(銍知王, 451~492) 때에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통합의 이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질지왕 2년(452) 세조(수로왕)와 허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황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전답 10경을 바쳐 충당케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삼국유사’의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의하면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를 지어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라고 하여 왕후사와 별개로 앞서 절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추측컨대 수로왕을 위한 대왕사와 함께 허황옥을 위한 왕후사가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에서 법흥왕을 위한 흥륜사(대왕사)와 왕비를 위한 영흥사가 지어졌던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로왕의 정도(定都)에 얽힌 16나한과 7성의 설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출자설과 함께 배에 싣고 왔다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의 설화는 모두 본가야의 개국과 왕후사 창건의 연기설화로서 뒷날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파사석탑은 4면 5층의 석탑으로서 조각의 기묘함과 석질의 희귀성 등이 인도 전래설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지만, 인도의 불탑 재료나 양식과 전연 다른 것이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 설화는 왕후사 창건 이후 어느 시점, 즉 삼국통일이 달성되는 문무왕대 이후 김유신 세력에 의해 창작된 설화로 보며, 그 역사적 배경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의 활발한 해상활동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밖에 만어사(萬魚寺)의 설화, 장유사(長遊寺)의 전설, 그리고 칠불암(七佛庵)의 설화 등에서도 수로왕 때의 불교와 관계되는 사실들을 전하고 있으나, 각 사찰의 연기설화로서 훨씬 후대에 창작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5세기 중반에 본가야는 정치개혁과 불교공인을 통하여 부흥을 모색하였으나 가야연맹의 맹주 자리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신라의 압력에 시달리다가 법흥왕 19년(532)에 멸망하였다. 그리고 5세기 후반에 이르러 가야의 여러 소국들을 재통합하려는 기운이 일어날 때에 고령의 반로국은 강력한 소국으로 발전하여 이를 중심으로 후기의 가야연맹이 형성되었다. 반로국은 ‘대가야’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시조신화에서도 수로왕과의 형제관계를 표방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인식아래 가야지역을 재통합하려고 하였다. 대가야는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예로써 ‘남제서(南齊書)’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즉 479년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하였다는 것이다. 남제(479~501)는 동진·송을 이은 중국 남조왕조의 하나로서 화북지역 북방 호족 출신 통치자들의 군사적 압력으로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났고, 또한 7명의 황제 가운데 4명이 살해되는 등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약세였지만, 남조불교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학승들에 의해 경전의 번역과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가야와 남제와의 교류는 정치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남조의 학문불교의 영향도 받게 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남제에 사신을 보낸 가라왕 하지는 가야금(伽倻琴)을 만들었다는 가야국 가실왕(嘉悉王)과 이름이 유사하여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가야금 및 가실왕 관계 전설이 고령지역에 전해지고 있어서 하지가 대가야의 왕이라는 추정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리고 가실왕이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가야금이라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이 악기에 맞는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 12곡의 이름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 등이다. 이 곡명들을 분석해 보면 하가라도와 상가라도는 대가야와 본가야의 왕도와 관련된 것이고, 보기와 사자기는 불교적 성격의 곡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지명들이다.

이들 지명 가운데 특히 하기문은 남원, 상기문은 임실에 비정되어 5세기말 내지 6세기 초 무렵에 대가야는 서쪽으로의 영토 개척을 더욱 추구하여 이미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북도 남원과 임실지방까지 영유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륵 12곡은 대가야 왕정에서 특별한 의식 때 연주되던 궁정음악 및 가야연맹체 소속 국가들의 음악을 궁정악사인 우륵이 듣고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보기와 사자기라고 하는 불교적 성격의 곡이 만들어진 것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는데, 불교가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던 소국들로 구성된 가야연맹체의 통합이념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각 소국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곡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연맹체를 구성하는 소국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갖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이러한 구성체들을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으로서 보기와 사자기 같은 불교적 성격의 곡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보는 불보 · 법보 · 승보 등 3보를 말하므로 보기는 불교의 공덕을 기리는 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자는 불교의 성스러운 맹수로서 부처를 수호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사자기는 불교의 수호와 함께 나아가 연맹체를 외침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는 곡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륵이 굳이 보기와 사자기라는 불교적 성격의 곡을 짓고, 또한 가실왕이 이를 왕정의 음악으로 받아들인 것은 불교를 통해 가야연맹의 사회를 통합하려는 의지의 산물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31호 / 2018년 3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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