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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

“소소한 일도 정법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이 참 불자입니다”

▲ 심산 스님은 “불자들은 늘 일상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고 있는지, 진리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갑습니다. 부산의 크고 작은 여러 법석에서 여러분들이 봉사하시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법회를 통해 만나 뵙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
지금 현생에 닥친 고통은
전생 과보로 생각돌리면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어

불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부처님 법과 하나되는 것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을때
비로소 행복한 삶을 살아

우리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이어져 가는 것은 여러분처럼 소리 없이 봉사를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없이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다음 세대들도 그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가리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러분들의 삶이 사회를 바로잡는 보현행이고 보살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내면서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달마(達磨)대사 아시지요? 흔히 달마대사 하면 큰 눈을 뜨고 험악하게 인상을 쓴 모습이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또 한때는 달마대사의 상호가 ‘수맥을 차단하는 효험이 있다’며 부적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달마대사의 겉모습이 아닌 그 가르침을 만나고자 합니다.

글로 전해오는 달마대사 법문 중에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두 가지로 들어가고 네 가지로 행한다”는 뜻인데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사행, 즉 행복으로 향하는 네 가지 실천을 살펴보겠습니다.

사행의 첫째는 보원행(報怨行)입니다. ‘보’는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갚는다는 의미일까요? 바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입니다. 원한을 갚는 행이라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불편한 것이 있고 어색한 것이 있고 또 해결하지 못한 무엇인가 있다면 ‘그 원인은 전생에 있다, 전생에 내가 현생의 이런 과보를 받을 원인을 지었기 때문에 받는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불편한 일이 있으십니까? 당장은 없는 것 같지요? 소소한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현상 가운데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다면 그 원인이 과거 전생에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하면 금생에 그것을 받아서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19살에 출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잘 모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출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출가를 해서 대학을 다닐 당시 서울 예술의전당 근처에 있는 대성사 법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20대 초반의 어느 날, 법회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숙사는 화계사 근처에 있었습니다. 대성사에서 걸어서 내려오는 길에 7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보살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노보살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제가 최근에 누구에게 7000만원을 빌려줬는데 못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70세에 가까운 노보살님께서 20대 초반의 스님에게 이런 상담을 하시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문득 어릴 때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아홉 살 정도 되는 동자승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스님은 왜 출가를 했어요?”라고 기자가 물으니 동자승이 대답하기를 “인생이 무상해서요”라고 답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실소가 나왔지만 아마 동자승이 절에 와서 항상 듣는 이야기가 ‘인생무상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저도 노보살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될까 고민을 하다가 이 생각이 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전생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하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 다음 법회에 가서 노보살님을 다시 만났는데 얼굴이 몰라보게 편안해 보이셨습니다. 보살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만약 전생에 내가 지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 다 갚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빚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잖아요.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야 있지만 이제 빚은 없는 겁니다.”

한 생각을 돌린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전생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니까 그 외에는 어떤 원망도 생기지 않더라는 겁니다. 마음을 쓰지 않으니까 건강을 해칠 일도 없고, 마음에서 복잡한 것이 사라지니까 후련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생인지 모르겠지만 ‘과거 생에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겠지’ ‘힘들게 했겠지, 그때 내 생각만 했겠지’하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문제는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행복의 길’에 이르는 첫 번째는 보원행입니다.

두 번째는 수연행(隨緣行)입니다. 한마디로 인연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는 것도 인연에 따라서 온 자리입니다. ‘누군가 가자고 해서’ ‘들어 보니까 좋아서’ 이렇게 저렇게 등등. 어떤 무엇인가의 인연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불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제가 젊은 시절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불교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온다고 하면 오라고 하고, 간다고 하면 붙잡아야 되지, 왜 오는 사람은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하니까 불교가 발전이 없다, 이렇게 비판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 미워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더 옵니다. 또 아쉬워서 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가려고 합니다. 세상이 묘해서 올 때도 올 인연이 있으니까 오고, 갈 때도 갈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잡지 않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인연입니다. 올 인연을 만들어야 하고, 갈 인연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왜 오는지 그리고 왜 가는지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올 수 있는 원인을 만들고, 가지 않을 원인을 만드는 작업이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두 번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입니다. 구하는 것이 없는 행이 행복으로 가는 방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뭔가 바란다는 의미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뭔가 원한다는 의미는 아직 그것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만큼이면 이만큼의 고통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몇 가지의 걱정을 하십니까? 걱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내 삶의 무게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걱정 없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님은 정말 좋겠어요. 사회로 말하면 성공하신 거잖아요.” 그 말만 놓고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홍법사가 사찰로는 성공했다고 여기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인생은 두더지 잡기”라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두더지를 하나 치면 또 다른 두더지가 올라오고, 그 두더지를 치면 또 다른 두더지가 올라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걱정만 없으면 좀 편하게 살아갈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절에 와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부처님, 제가 이것만 해결하면 보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해결되는 순간 또 다른 하나가 튀어 올라옵니다. 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에 지어 놓은 업이 지금 드러나는 겁니다. 문제는 지금 드러나는 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내 속에 또 다른 업의 씨앗이 있어도 그것이 하나의 업으로 발화가 되기 전에는 지금 드러난 업이 소진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마음에 어떤 걱정거리 하나 있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차라리 그게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뇌와 고통은 언제든지 찾아오는 것이고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구하는 바가 없다면 최상의 행복이겠지만 만약 아직 삶에서 구하는 것이 있다면 구하는 만큼의 고통도 함께 존재함을 아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칭법행(稱法行)입니다. 칭법행은 진리와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다 불자이십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대로 살고 계십니까? 진리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계십니까?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단 한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중생입니까, 부처입니까? 원인을 두려워하시나요, 결과를 두려워하시나요? 여기서 중생과 부처가 갈라집니다. 원인을 두려워하면 부처요, 결과를 두려워하면 중생입니다. 은행에 가서 돈을 훔쳤다고 칩시다. 안 들키면 그만인가요? 훔치고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니까 원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건너는데 무단횡단을 했어요. 무단횡단을 할 때 잡히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원인을 짓지 않으면 부처입니다. 소소한 일이라도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을 때 행복이 있습니다. 아닌 것도 맞는 것처럼 여기고 결과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면 그것이 결국 불행이 됩니다.

종합해 보면, 첫째는 보원행, 나에게 불편하면 전생에 내가 잘못한 일이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연행,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좋아지고 싶으면 좋은 인연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무소구행, 원하는 것이 없으면 제일 큰 행복인데 만약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칭법행, 법답게, 법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입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소중한 시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시간이 어떻게 하면 유익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행이 사회를 아름답게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가 될 것입니다. 늘 불자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3월12일 부산 적십자회관 8층 회의실에서 봉행된 ‘대한적십자사 부산광역시지사 불교지구협의회(회장 김지연) 창립 14주년 기념법회’에서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32호 / 2018년 3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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