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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어느 날 달팽이가 내게 왔다

기자명 최원형

과거·미래 아닌 이 순간 사는 작은 존재들의 깨우침

며칠 전 주말 저녁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큰 아이가 쌈을 싸려던 상추에서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동물 종 99%가 달팽이 크기 이하
벌레는 끊임없이 지구 비옥케 해
인간 출현 훨씬 전부터 지구 살아

식구들 눈이 일제히 그 상추 위로 쏠렸고 거기엔 작은 민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달팽이도 놀랐는지 몸을 웅크려서 몸길이가 1센티미터나 될까 싶었다. 모르고 그냥 상추를 먹었으면 어쩔 뻔 했냐며 우리는 안도했다. 작은 아이는 다른 상추 잎을 뒤적이며 또 있을지 모를 달팽이를 찾았다. 우리 눈에 띈 건 결국 한 마리였다. 달팽이가 상추 잎에 딸려 우리 집에 온 것이다.

갈무리해뒀던 빈 병에다 상추 잎과 함께 달팽이가 지낼 공간을 마련했다. 혹시나 밖으로 나올까 싶어 뚜껑에 구멍을 몇 개 뚫어 덮어두었다. 상추 잎 사이에 있다가 느닷없이 환한 불빛 아래로 끌려나온 달팽이도 정신이 없었던지 병 속에서 잠시 어리둥절한 것 같아 보였다.

밥을 먹으며 슬쩍 들여다보니 그 사이 안정을 되찾은 건지 더듬이를 내밀고 몸도 길게 주욱 늘이기 시작했다. 식탁 위 전등 불빛이 너무 밝은 것 같아 통풍이 되는 어두운 곳으로 옮겨 줬다. 큰 아이는 달팽이를 놔줘야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지금 바깥에 달팽이가 뜯어 먹을 풀이 있겠냐고 작은 아이는 지금 풀어주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 했다. 해서 텃밭에 야채가 자랄 때쯤 풀어주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 날 저녁에 큰 아이는 달팽이를 들여다보다가 병 바깥에 붙어있는 달팽이를 발견했다.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바닥에라도 떨어졌다면 어쨌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아이는 달팽이를 병 안에 넣어주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달팽이한테 왠지 미안하다고 했다. 겨우내 비닐하우스 채소밭에서 싱싱한 먹이를 양껏 먹고 마음껏 돌아다녔을 텐데 이렇게 좁은 병 속에 갇혀 있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꽤 오래전 식용달팽이를 얻어와 어른 주먹만 해 질 때까지 키웠던 적이 있다. 갓 부화한 새끼 달팽이는 거의 투명한 흰색이었다. 곧 여름휴가를 떠나야 해서 달팽이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런데 휴가지에 도착해서 일이 벌어졌다.

짐을 풀고 근처 숲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달팽이가 있어야할 통이 텅 비어 있었다. 달팽이를 담아온 통 뚜껑이 제대로 닫히질 않았던지 달팽이들이 죄다 탈출해버린 거였다. 워낙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 혹시 우리가 밟은 건 아닌지 그랬다면 어떡하느냐며 아이들은 발바닥을 확인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바닥과 벽에서 찾아 낸 게 겨우 일고여덟 마리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집에서 출발할 당시 스무 마리 가까이였던 것에 비하면 절반도 찾지 못했다.

실망하는 아이들에게 근처가 온통 숲이니 달팽이들이 무사히 숲으로 갔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고 달랬다. 식용달팽이가 숲에서 과연 살 수는 있을지, 오히려 우리가 생태계에 얼마나 부담을 줬는지는 차마 말해줄 수 없었다. 아이들은 더욱 애지중지 달팽이를 보살폈고 무사히 그 달팽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달팽이가 자라면서 중간에 또 탈출을 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세 마리가 어른 달팽이가 되도록 함께 지냈다. 밤에 조용히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부스럭 대는 소리가 자주 들리곤 했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던 그 소리의 진원지를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됐다. 우리가 잠드는 시간에 깨어나 활동하는 달팽이가 엄청나게 많은 치설로 야채를 갉아먹는 소리였다. 부스럭대던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게 된 날 달팽이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책을 찾아 읽으며 달팽이와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알아두면 유익할 것들을 제법 배웠다.

달팽이집은 상처입거나 부서져도 금세 회복된다. 흙은 매우 중요한 먹이며 달팽이집을 만들고 상처를 회복하는데도 꼭 필요하다. 달팽이는 처한 환경이 힘들어지면 잠을 자며 때를 기다린다. 추운 겨울엔 집 입구에 벽을 차곡차곡 만들며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잔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달팽이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지구에서 살고 있다. 그런 달팽이가 지구를 오염시키기는커녕 달팽이를 비롯한 벌레들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 종 가운데 99퍼센트에 가까운 동물들 크기가 달팽이만 하거나 그 보다 작다고 한다. 작은 존재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경이로움은 커져만 간다.

이따금 유리병 속 달팽이를 들여다본다. 넓은 곳으로 나갈 날을 기다리며 조바심 내는 것은 우리다. 달팽이는 다만 잠을 자고 먹고 기어 다니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할 뿐이다. 오지 않은 미래나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이 작고 작은 존재에게 배우는 바가 크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32호 / 2018년 3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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