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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성지 깨진 벽돌과 석불이 제행무상을 설합니다”

  • 동행취재
  • 입력 2018.03.26 13:55
  • 수정 2018.03.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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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특별법문-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과 상원사 주지 해량 스님이 라즈기르 영축산 여래향실에서 축원을 올리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의 스님과 불자 32명이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의 증명으로 3월5일부터 16일까지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아래 법문은 정념 스님이 녹야원과 성지에서 설한 법문을 남배현 모과나무 출판사 대표가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녹야원은 초전법륜성지이며
불법승 삼보가 완성된 자리

사성제·팔정도 설함으로써 
중생들에 ‘성도의 길’ 제시 

고통 원인은 ‘나’라는 집착
전도몽상의 눈으로 본다면
결코 고통서 벗어날길 없어

제행무상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오욕락에서 벗어나
진정한행복 완성할수 있어

순례자 일상으로 돌아가면
늘 회광반조하는 마음으로
부동심 깨닫도록 수행해야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초전법륜성지 녹야원은 법을 설하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다섯 명의 승가 즉 삼보(三寶)가 완성된 자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성도를 하신 뒤 49일 동안 선정에 드셔서 당신의 깨달음에 대해 사유하고 깊은 법락(法樂)에 취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미혹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야겠다”는 금강 같은 마음을 내십니다. 그런 연후에 과연 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할 것인가 하고 깊이 사유해 보니 바로 당신과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다섯 비구가 바로 녹야원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로서 관하시고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해야겠구나!”하고 마음을 내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다가야에서 270여km나 떨어진 녹야원으로 향하십니다.

▲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법을 설하고 있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첫 설법은 부처님의 위대한 자비심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중생을 향한 끝없는 자비심을 일으켜 법륜을 굴리기 시작한 일대사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비구가 녹야원에 계신 것을 살펴보신 부처님은 갠지스강을 건너십니다. 녹야원의 바로 옆에 있는 영불탑은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처음 맞이한 곳으로, 다섯 비구는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다가 부처님께서 타락했다면서 떠난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부처님 곁을 떠나면서 “다시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보지 말자”고 다짐까지 했습니다. 다섯 비구는 본래 석가족 출신으로, 정반왕이 자신의 아들인 고타마 싯다르타가 염려되어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면서 보호해 줄 것과 도반으로 지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알라라카라마’라는 당대의 위대한 명상수행자의 제자가 되어 함께 수행했던 그들은 6년 동안 피나는 고행을 함께 했지만 수자타 여인의 유미죽 공양을 받아 드신 고타마 싯다르타를 보고 “마음이 타락해 변절되었다”고 비난하면서 녹야원으로 떠났던 겁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비고비락(非苦非樂)이라는, 낙에도 취하지 않아야 하며 육년 고행도 고행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도(中道)의 이치를 바로 알고 중도적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다섯 비구를 제도하기 위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약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부처님을 처음 보고서는 “부처님이 오면 보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아는 척도 하지 말자 했으나 부처님의 위의에, 벌써 깨달음을 성취한 위의를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흔쾌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참 의미의 첫 설법을 ‘상호설법(相好說法)’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다섯 비구를 향해 첫 법문으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십니다. 사성제라는 성스러운 진리, 네 가지의 진리는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입니다.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는 네 가지의 진리로, 이것은 바로 코끼리의 발자국과 같아서 그 발자국에는 뭍짐승의 발자국을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성제 수행을 통해 그 누구라도 성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법을 설하십니다.

그렇다면 고성제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도의 의사들이 사람을 진단할 때와 같이 “아! 아프구나”하는 현상을 관찰한 뒤 이 병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 원인을 살펴내는 것이 바로 집성제입니다. 고성제라는 것은 일체 사바세계 중생의 삶이 고통이라는 진단입니다. 생로병사, 우리 인생의 삶 자체가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의 고통인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로 애별리고(愛別離苦)입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니 고통이라, 구부득고(求不得苦)라 우리가 일체를 구하고 있지만 모두 충족할 수 없으니 고통입니다.

고통을 치유하고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탐욕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모습이 바로 멸성제입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치료의 방법은 곧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바로 팔정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덟 가지의 치유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바로 멸성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 가사 공양을 올리고 있는 불자들.

팔정도는 팔중도, 팔성도라고도 하는데 중(中)은 곧 성(聖)이기도 합니다. 성스러운 길입니다. 중을 통해 성을 이루기에 팔정도, 팔중도, 팔성도요 도제라고 합니다. 도의 길입니다.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입니다. 바른 견해라 하는데 바른 견해는 무엇입니까? 바로 고집멸도를 바르게 이해는 것입니다. 삼법인을 명확히 가슴 속에 새겨 각인하는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다는 가르침,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가르침, 열반적정(涅槃寂靜)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성제를 공(空)의 도리로서 잘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온을 비추어 볼 때 깊은 반야의 행을 하면서 오온이 텅 비었다는 것, 우리의 온몸과 마음이 모두 비었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서는 일체 고통으로부터 건널 수 있는 묘용이 바로 오온이 비었다는 것을 비추어 바로 보는 겁니다. 녹야원 설법 속에서 사성제, 팔정도,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상가를 설하고 계십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모두 인연의 법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는 색수상행식이, ‘나’라고 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 된 견해로 인해 모든 것이 고통으로만 다가오게 됩니다. ‘나’라는 몸과 마음 일체가 인연의 법에 의해서, 온 우주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에 의해서, 이 인연에 의해서 나의 오온이 지금 이와 같이 형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주만상은 제행무상이라, 일체가 변하고 있는 그 속에서 나도 오온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내가 천년만년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지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나!나!”하면서 탐욕에 빠집니다. 일체가 영원하지 아니한데도 그 속에서 영원함을 구하는 것은 바로 아지랑이를 구하는 것이요 허공 속의 구름을 붙드니 것이니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 정견입니다. 

정사로서 하는 정어(正語)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말이라는 것은 인생의 8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신중하게 하고 정어(正語)로서, 바른 말로서, 말을 절제하고 지혜로운 언어를 쓰라고 했습니다. 또 부드러운 말, 화합할 수 있는 말로서 우리는 나와 더불어 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서 큰 문제가 시작되는 발화점을 보면 전부 잘못된 말로 인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불가에서는 잘못된 말은 칠성재(七聖財)를 불태운다고 했습니다. 자연의 이치로 볼 것 같으면 불이 타고 나면 새롭게 싹이 날 수 있지만 칠성제를 태우게 되면 성불의 종자까지 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혼란하게 하여 다툼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말의 불길입니다. 그래서 이 정어라는 것, 말을 잘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또 자신의 공덕을 짓고 또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 으뜸의 덕목입니다.

이어서 정업(正業)입니다. 정업은 바로 행(行)입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잘 지어야 행복합니다. 행위에 따라 선업을 만들기도 하고 악업을 만들기도 합니다. 정업을 바르게 일으키고 말고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업(業)은 본래 구름과 같고 또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실체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업은 소멸시킬 수 있는 겁니다. 쉼 없이 업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항상 선업을 쌓아서 정업을 통해서 악업을 소멸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 월정사·상원사의 스님과 불자들이 탄생 성지 룸비니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다음은 정행(正行)입니다. 행은 업(業)이라고 합니다. 직업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직종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악업을 짓지 않는 우리의 업, 생업을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선업을 증장시킬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은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입니다. 쉼 없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열반을 증득하고 대해탈, 대자유를 구족하고 성불의 그 길까지 쉼 없이 바른 정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입각한, 계정혜 삼학에 입각한 바른 정진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쉼 없이 무소의 뿔처럼 우리는 당당히 정진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정진입니다. 삿된 견해에 휘말리거나 삿된 종교에 잘못 끌려가거나 또 잠깐이라도 정진의 마음이 소홀해지거나 잘되지 않는다고 또 망상을 부려서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정정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어서 정념(正念)입니다. 정념은 제 법명으로, 탄허 스님께서 내려 주셨지만 정념은 바른 통찰, 깨어있음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데 항상 치우침 없이 바르게 깨어서 바라볼 수 있는, 항상 놓치지 않는 이런 마음이 바로 정념입니다. 사실은 수행에 있어서 정념이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항상 깨어서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정념이기 때문입니다.

또 정정(正定)입니다. 바른 삼매 바른 집중이라고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깊은 무심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사마타라는 정정 삼매는 정념과 정정이 함께 쌍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우리는 정혜(定慧)라고도 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도 합니다. 성성한 상태를 한편으로는 정념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또 적적이라는 것은 본래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빈자리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금 정견으로서 고집멸도와 사성제를 자기 것으로 명료하게 각인해 실천하는 삶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와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해 아소카 왕(마갈타국 마우리아왕조 3대왕, BC 273~232년 재위)과 그 후대가 남긴 불교유적과 문화들을 성지 곳곳을 순례하시면서 확인하셨을 겁니다. 불교문화의 꽃으로 평가받는 엘로라, 아잔타 석굴까지 순례하시면서 어떠한 생각이 드셨나요? 엘로라 석굴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참배하면서 그 위대성을 형상으로나마 확인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의 성지를 보면서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설하신 그 가르침이 더욱 선명하게 법(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깨달았을 겁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불교문화가 꽃피웠지만 그것 역시 성주괴공의 법칙에 따라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됩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도리와 함께 오늘날 다시 불교의 새로운 씨앗과 꽃이 피어나는 시절 인연을 인도 땅에서 확인하셨을 겁니다.

우주법계에서 볼 것 같으면 순례 도반들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위없는 무량한 공간 속에서, 또 시간으로 본다면 무량한 시간 속에서 대한민국 월정사, 상원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연을 맺어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에 와서 순례를 했습니다. 그렇기에 순례도반들은 엄청난 인연의 공유(恭惟) 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성지를 참배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각자 다를 수도 있겠으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대의인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란 경구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탄허 큰스님께서도 “무소득(無所得)이다, 얻을 것이 없다, 한 법도 얻을 법이 없는 그런 법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법도 얻지 않고 돌아가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방하착(放下着)으로 회향해 최상의 가르침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셨다 할 수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항상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면서 빈자리를 바로 보아 부동심(不動心)을 얻을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무상함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오욕락(五欲樂)에 물들지 않도록 쉼 없이 정진합시다. 방일하지 맙시다.

인도=남배현 모과나무 출판사 대표 nba7108@beopbo.com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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