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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프리다 칼로의 고통으로부터 탈출

기자명 김정빈

“이 외출이 행복하길,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길”

▲ 그림=근호

1907년생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아홉 달 동안 병원에 갇혀 지낸 후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못 쓰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발목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그녀를 ‘나무다리’라며 놀렸다. 언니 마틸다만이 그녀와 마음을 나누는 유일한 친구였지만 어느 날 그녀는 가출을 해버렸다.

6세 때 소아마비로 다리 불구
18세 땐 교통사고로 배 관통
침대 누워 그림 그리기 결심

고독한 생활 중 공산당원 되며
디에고 리베라와 운명적 만남

세 번 유산과 사고 후유증에도
끝없는 열정으로 화가로 성공

폐렴으로 파란만장한 삶 마감
다음 생은 ‘행복한 천국’ 꿈꿔

프리다는 자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썼다.

“김이 서린 유리창 위에 손가락으로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걸 상상하면 기분이 좋았다. 핀손이라는 우유가게까지 가서 핀손(pinzón)의 ó 자를 지나 지구 중심까지 내려가면 ‘상상 속의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명랑했고, 많이 웃었다. 그녀는 민첩했고, 말이 없었으며, 무게가 없는 가벼운 춤을 추었다. 그녀를 따라 춤추며 나는 나의 모든 비밀을 그녀에게 얘기했다.”

무시무시한 사고가 그녀를 덮친 것은 18세 때였다.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에 옆구리를 들이받혔다. 척추 세 군데와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대퇴골 경부가 끊어졌다. 왼쪽 다리에 열한 군데 골절이 있었고, 오른쪽 발은 탈구되어 으스러졌다. 왼쪽 어깨는 빠졌고, 골반은 세 동강이 났다. 버스의 철제 막대기가 그녀의 왼쪽 어깨를 찌르고 배를 관통한 다음 질로 빠져나오며 전신을 관통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충격 때문에 한동안 딸을 보러 오지 않았다. 언니 아드리아는 소식을 듣고 기절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슬픈 나머지 병에 걸려 스무날 동안을 누워 지냈다. 당사자의 고통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퇴원 후 침대에 묶여 지내는 동안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게다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그림이 그 이유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침대 위에 닫집을 만든 다음 닫집 지붕에 해당하는 곳에 딸이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달아주었다. 이렇게 하여 어린 시절 그녀가 유리창에 그렸던 문은 거울로 대체되었다.

프리다 칼로는 방에 갇혀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하며 고독과 맞서 싸웠다.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고국인 멕시코는 물론 바깥세상이 놀랍게 변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1928년, 스물한 살인 그녀는 공산당원이 되었다.

같은 해, 프리다 칼로는 어린 시절 한 번 본 적이 있는 저명한 프레스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운명의 남자로 만났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공산당원이라는 것에서 둘은 일치했다. 삶을 치열하게 산다는 점에서도 둘은 같았다. 일본 스모 선수 같은 체격을 가진 디에고는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서의 엄청난 매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디에고는 거짓말쟁이에다 난폭하고 복수심이 강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이 끌렸고, 그건 디에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9년, 스물한 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리베라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다음 해, 프리다는 첫 번째 임신을 했지만 교통사고와 골반 이상 때문에 중절 수술을 해야만 했다. 두 해가 지나 그녀는 다시 임신을 한다. 하지만 의사는 건강 상의 이유를 들어 낙태를 권유했다. 남편 디에고는 플레이보이 기질을 보였고, 그녀는 우울증을 앓았다.

27세이던 1934년에 프리다는 세 번째 유산을 하고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더 큰 고통이 그녀를 강타했다. 남편 디에고가 막냇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불륜 관계라는 것이 밝혀졌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적십자 병원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던, 프리다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었던, 자신과 가장 많은 것을 나눈 친형제가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했고, 몇몇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다. 37세 때부터 프리다는 석고 가죽 코르셋으로는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강철 코르셋을 착용했다. 몸을 옥죄어오는 고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39세 이후 그녀는 여덟 번의 척추 수술을 받았다. 46세 때 열린 자신의 전시회에 그녀는 침대에 실린 채로 참석했다. 그해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1939년, 프리다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파리에서 연 전시회가 피카소, 칸딘스키 등 거장들에게 격찬을 받은 것이다. 그녀의 그림이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그해, 그녀는 디에고와 이혼한다. 하지만 다음 해, 신경쇠약에 걸린 그녀는 성적인 결합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을 달아 다시 디에고와 결합했다.

1954년 7월 2일, 그녀는 폐렴에 걸렸다. 12일, 그녀는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검은색으로 죽음의 천사를 그린 다음 유언으로 읽어도 좋은 두 글귀를 썼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다음 날, 그녀는 파란만장했던 마흔일곱 해 삶을 마감했다.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는 프리다 칼로 식으로 말하면 ‘세속 삶으로부터의 외출’이다. 그분 또한 그 외출을 통해 ‘행복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분은 죽음 이후가 아닌 현실의 삶에서 프리다 칼로가 바랐던 행복을 그보다 훨씬 높은 열반 차원으로 성취하셨다.

불교는 삶을 고통으로 보아 그 초월을 지향한다. 삶에는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그 둘 모두가 고통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고통은 고통이기에 고통이고, 즐거움은 영원히 머물러 주지 않아서 고통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하지만 중생은 고통이 고통인 줄은 알아도 즐거움이 고통인 줄은 모른다. 영원히 머물러 주지 않는 것을 모른 채 잠시 머무를 뿐인 즐거움만을 한사코 추구한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실망, 실망뿐. 그리하여 중생의 희망은 죽음 이후로 연장된다. 살아서는 완전한 행복이 불가능하므로 죽은 다음 천국에서 완전히 행복해지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천국이 살아서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활짝 깨어 자신과 세계를 주시, 통찰하는 사람은 살아서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불교는 내일을 약속하는 어음이 아니다. 불교는 현재 사용이 가능한 현찰로서의 종교, 갓 퍼올린 샘물처럼 새롭고 신선한 오늘의 종교, 지금 이 순간의 종교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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