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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생존에 필요한 색

기자명 최원형

회색 질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녹색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한 선배는 3월 하고도 중순을 넘어섰는데도 계속되는 눈 폭풍 때문에 눈 치우느라 너무 힘들다고 했다. 봄눈이라 절로 녹지 않겠냐고 했더니 눈이 그치고 몇 시간 내로 집 앞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단다. 법이란 게 때로는 정상참작 내지는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단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지구의 기상이변은 지난 겨울 동안의 혹한에 이어 며칠 전 춘분에 내린 눈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이렇듯 날씨가 잦은 변덕을 부리니 예측이 어려워지고 하늘을 살펴야 하는 농사일은 점점 힘들 수밖에 없다.

의식주 이동 원활해짐에 따라
자립능력 형성 전에 소비 익숙
소비 확산되면서 환경도 파괴
자연과 연결돼 있음 자각해야

지나간 기사를 찾아보면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로 작물을 망친 사례가 차고 넘치도록 많다. 느닷없이 7월에 비와 함께 우박이 쏟아져 농사를 망친 사례가 작년에도 여러 지역에서 있었다. 복숭아, 사과 같은 과일에서 여러 채소에 이르는 피해로 농민은 시름에 잠긴다. 농민의 시름은 곧 시장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며 소비자의 시름 또한 깊게 한다.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의 의식주는 모두 남에게 맡겨져 있다. 입을 옷이나 사는 집은 고사하고 내 손으로 한 끼 밥상은커녕 단 한 가지라도 스스로 키워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오래전 교육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어떤 풀은 먹을 수 있고 어떤 풀은 먹으면 절대 안 된다든지 하는 지식이 대대로 이어져왔다. 그렇게 의식주를 스스로 챙기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내게 의식주를 공급해주는 자연이야 말로 잘 돌보고 함께 살아야할 곳이라는 걸 깊이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오고 회복할 시간을 두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으로 모든 인프라가 마비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이며 그때 나는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이따금 해 본다. 미리 비상식량을 확보해두는 것 말고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그조차 극히 한시적인 조치일 뿐이다. 위기감에 당장 뭐라도 할 수 있는 기술을 좀 배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살기 바쁘다.

어느 순간 자급은 소비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자급자족 없이 생존하려니 의식주 이동이 원활해야 했다. 소비재 이동을 위해 도로, 철도, 항만 같은 기반시설이 필요했다. 이런 회색 기반시설들을 따라 소비문화가 확산되면서 지구는 혹사당했고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지난 겨울의 혹한이나 때 늦은 봄눈이나 모두 그 맥락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회색의 질주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녹색이다. 도시에서 녹색 인프라를 꼽자면 단연 공원이다. 공원은 단순히 도시를 계획할 때 넣는 시설로서 토지공간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녹색복지로서 필수요소다. 도시에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초록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만날 수 있는 쉼의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공원은 회색 콘크리트 숲이 조여오던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산사에 갔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찰 고유의 분위기도 한몫하겠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이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경관은 사람의 마음에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자동차와 사람, 콘크리트에 시달리다 문득 초록의 열린 공간을 만나게 되면 심호흡을 하게 되고 마음의 여유를 찾곤 한다.

공원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마당에 2020년부터 공원일몰제가 시행될 예정이다. 각 지자체에서는 근린공원이 필요한 지역을 조사한 뒤 2020년까지 공원조성계획을 수립시행하고 토지보상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런 절차를 그때까지 추진하지 못하면 공원조성계획은 없던 일이 돼버린다. 이것이 공원일몰제다. 공원이 들어설 예정지로 계획된 곳 가운데 83%가 아직 토지 매입조차 안 된 상태로 조만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렇게 공원예정지가 축소된다면 토양형성이나 생물다양성 등을 구축하고 있던 도시 생태네트워크 기능이 끊길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인구수가 전체 인구의 90%를 넘어섰다. 도시 인구 쏠림은 생활환경을 날로 열악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도시공원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주요 지표이며 환경권을 보장하는 공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자립할 능력을 배우기에 앞서 소비문화에 젖어들다보니 자연마저 소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 아닌지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가 모든 주변의 것들과 거듭거듭 연결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이 절실하다. 법도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공원은 예정대로 유지돼야 한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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