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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기자명 이숙희

“도솔산으로 보내달라” 영험 보인 금동지장보살좌상

▲ 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 조선 초기, 높이 83cm.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번지 선운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은 1963년 1월21일에 보물 제279호로 지정되었다(사진 1). 원래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2014년 지장보궁전(地藏寶宮殿)이 완성되면서 그곳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하였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당시 도난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사찰에서 전하는 기록에만 간략하게 적혀 있다.

보물 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
일제강점기 절도범에 도난
일본으로 팔려간 후 소장가들
꿈에 나타나 “보내달라” 호소

외면하던 소장가들 병이 들고
집안 우환 끊임없이 반복되자
고창경찰서 연락해 이운 부탁
2년 만에 고창 선운사로 귀환

1936년 여름 어느 날 문화재 절도범은 일본인 2명과 함께 공모하여 금동지장보살상을 훔쳤다. 그 뒤 거금을 받고 불상을 일본으로 팔아넘겼다. 그런데 일본으로 건너간 후 지장보살상의 영험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불상을 불법으로 구입한 소장가의 꿈에 수시로 지장보살상이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으니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이후 병이 들고 집안이 점점 기울게 되자 지장보살상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그러나 다른 소장자 역시 꿈에 지장보살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지장보살상은 몇 차례에 걸쳐 옮겨 다녔으나 매번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고창경찰서에 연락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은 1938년 11월에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서 지장보살상을 다시 모셔오게 되었다. 그때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 있으며 사진 뒷면에는 불상 반환과 관련된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사진 2).

지장보살이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약한 보살을 말한다. 석존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보살이다. 인도에서는 크게 신앙되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죽은 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믿어 일반 대중들에게 깊은 신앙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조에 의해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로부터 지장보살이 신앙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 반환 사진과 뒷면 설명문. 선운사 제공.

‘지장시륜경(地藏十輪經)’과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 따르면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의 경지에 이르렀고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얻었다고 한다. 그 형상은 삭발한 스님의 모습으로 왼손에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보주와 석장(錫杖)을 지닌 승려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종교적인 영험 때문인지 신라나 고려 불상과는 다른 불심이 엿보인다. 높이 1m 정도의 아담한 크기에 단독상으로 모셔져 있다. 단독상일 경우에는 좌우에 지하세계를 주재하는 시왕(十王)을 거느리고 명부전(冥府殿)에 안치되며 삼존불상은 지장보살상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운사 지장보살상은 좌우의 협시나 시왕상들이 남아 있지 않고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니 전각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상체가 크고 두 다리가 빈약하여 신체 비례가 자연스럽지 않다. 머리에는 두건을 쓴 전형적인 지장보살의 모습인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감싼 후 양쪽 귀를 덮으면서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두건은 머리 뒤쪽에서 매듭으로 묶였으며 그 아래로 층단을 이루는 주름이 표현되었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중국 당대에 번역된 ‘지장시륜경’에서 유래되었으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고 서역과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형식이다.

얼굴은 넓적하면서 턱이 이중으로 처리되었으며 이목구비는 작고 가운데로 몰려 있어 살찐 모습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왼쪽 가슴부분에 가사를 묶은 띠매듭과 사각형의 장신구가 표현된 것이 특이하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는 옷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옷주름이 한쪽 방향으로 쏠리듯이 일률적으로 표현되었다. 드러난 가슴 위로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이며 세 줄로 내려온 목걸이가 장식되었다. 이러한 착의법과 장신구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 보살상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또한 오른손은 위, 왼손은 아래에 두고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손의 위치나 오른손에 손금이 새겨져 있는 점 등은 같은 경내에 있는 고려 후기의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하다(사진 3). 지장보살상의 지물은 석장과 보주가 일반적이지만 도솔암 지장보살상의 경우는 손에 법륜(法輪)를 쥐고 있다. 선운사 지장보궁전의 금동지장보살상 역시 왼쪽 손바닥 위에 남아 있는 지물의 흔적으로 보아 법륜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륜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중생을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을 가진 보주와 거의 같은 상징성이 있다.

▲ 선운사도솔암금동지장보살좌상, 고려 후기, 높이 97.5cm.

선운사란 이름은 사찰이 위치한 곳인 선운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운사사적기’에 의하면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 누워 참선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을 뜻한다. 선운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숙종대인 1713년에 기록된 ‘대참사사적기(大懺寺事蹟記)’에 의해 신라 진흥왕 때 검단선사가 대참사(大懺寺), 중애사(重愛寺)와 함께 세운 사찰이라 전한다. 또한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倉修勝蹟記)’에는 선운사는 1470년(성종 원년) 행호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어실(御室)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1608년에서 1609년에 걸쳐 사찰이 중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면서 점차 사세가 번창하여 선운산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많은 전각과 부속암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선운사에는 지장보궁전의 금동지장보살상 외에 도솔암 도솔천내원궁 금동지장보살상(보물 제280호), 참당암 약사전 석조지장보살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선운사 경내에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3구의 단독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예부터 이 지역이 지장보살의 도량으로 지장보살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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