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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파타차라 ⑥

기자명 김규보

“그대 마음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다”

“보이는가, 파타차라여. 그대의 가족은 세상을 떠났다. 그대 때문도, 세상 때문도 아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인연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의 가족은 인연이 서고 지는 자리에서 태어났고 떠났다. 그러니 파타차라여. 죽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 대신 자신을 청정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라. 열반으로 나아가라.”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변하며 
우주만물 인연따라 움직이니
해가 뜨고 지듯이 해탈 이루어

파타차라의 한 생애가 동쪽에서 떠올라 하늘 가운데로 올라선 뒤, 낙조가 길게 늘어진 서쪽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어둠을 사르는 별빛 속에서 인연이 무르익으면, 생애는 다시 새로운 하늘로 솟아오를 것이다. 억겁 윤회를 통과하는 동안 만나고 헤어진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파타차라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붓다시여. 헛된 망상에 빠져 부질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후회하고 그리워하다 이윽고 원망했던 모든 일은 뚜렷하게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는 광경을 비로소 보고 있나니, 붓다시여. 제가 이곳을 의지처 삼아 수행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정진하여 열반에 이르도록 하겠나이다.”

“장하구나, 파타차라여. 어제까지 어둠을 헤매던 그대가 이제 눈을 뜨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 그대 마음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다. 출가를 허락하겠으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말을 마친 붓다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다. 파타차라는 자신에게 손짓하는 비구니들을 따라 기원정사 밖으로 걸어갔다.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여겼던 지난날이 별빛에 스미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파타차라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한 생각 잡고 있던 이도, 그 생각 놓아 버린 이도 자신이었다. 오롯이 서게 된다면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을 터다. 파타차라는 붓다의 말처럼 부지런히 정진하여 깨달음에 이르겠다고 서원했다.

비구니들이 머물고 있는 승원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의 지도를 받고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했다.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보았다.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나가는 것을 붙잡지 않았다. 강물이 흘러 바다에 닿는 것과 같았다. 밤을 꼬박 새운 파타차라가 문득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양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흙을 데웠고, 흙에서 삐져나온 온기는 나무껍질을 타고 올라가 잎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인연의 순환이 하루만큼의 변화를 풍경에 아로새겼다.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 파타차라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수행에 매진하며 며칠을 보낸 뒤, 파타차라는 발을 씻던 중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깊이 관찰했다. 첫 번째로 발에 뿌린 물은 짧은 거리를 흘렀다. 두 번째 뿌린 물은 그보다 멀리 흘렀다. 세 번째 뿌린 물은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제각기 거리로 흘렀지만 결국 흙으로 내려앉는 건 매한가지였다. 제각기 삶도 그러하거늘, 어찌 매달리고 집착했던 것일까. 준마(駿馬)가 달릴 때 매섭게 집중하듯, 파타차라는 마음을 온전히 집중했다.

그런 뒤, 등불을 들고 숙소로 들어가 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집중된 마음으로 등불에서 나오는 빛을 주시했다. 심지를 꺼내자 등불이 꺼졌다. 파타차라는 생각했다. 심지가 없으면 불은 있을 수 없다. 심지가 있었기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원인과 조건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존하고 변해간다. 붓다를 만나고 지금까지 알게 되었던 진리가 마침내 하나로 연결됐다. 파타차라는 모든 것이 소멸되었음을 알았다.

“청하지 않았는데 와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떠났다. 올 때처럼 떠났거늘, 슬퍼할 이유 어디에 있는가.”

한바탕 폭풍우에 휩쓸렸던 얼마 전 순간이 올 때처럼 떠났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오고 갔다. 파타차라는 완전한 해탈을 이뤘다. <끝>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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