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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타인에 대한 연민심은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듭니다”

▲ 안성두 교수는 “현재 우리가 접한 위기상황 극복은 보살행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요즘 좋은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보살행으로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의 다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보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위기 불러
보살행은 물욕에서 벗어나는 길
타인에 연민심 갖는 것 어렵지만
중생 가엽게 여기는 게 곧 구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대승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실천이고 가르침인 것은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실 보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초기불경에서 미륵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습니다. 그럼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직후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나서 자신이 왜 깨달음을 얻었는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마라, 그러니까 욕망의 신이 나타나 “당신은 생사가 없는 생애를 경험했으니 이제 당신께서는 더 이상 일상에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석가모니는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죠. 생사에 무엇을 하더라도 더할 것이 없었고 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범천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권유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을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라고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큼 깊이 깨닫지는 못하겠지만 많은 사람이 그 가르침을 다시 체험하고 경험함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답변은 기대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니다. 나의 깨달음은 너무 심오하기에 이를 전달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범천은 3번에 걸쳐 권유했고, 결국 부처님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입니다. 부처님은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을 설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전달될 수 없는 심오한 깨달음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법을 전하겠다는 그 결의가 대승불교의 핵심요소이고 불교의 핵심입니다.

깨달음과 자비의 법 사이에서 깊은 성찰을 함으로써 불교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넓게 봐서는 세상 사람들을 관통하는 종교로서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궁극적 목표가 타인의 행복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접한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대승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보살행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살행에 대한 경전을 읽었을 때 느꼈을 법의 기쁨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한 정신적 가르침에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이러한 정신적 행복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굉장히 어렵고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당시에는 정신적 행복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고 주말마다 종교활동을 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무한 경쟁 속에 불안함이 자리 잡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이 시대의 정신적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됐을까요? 지나친 시장주의 때문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시장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소위 탐욕과 욕망이 확대되면서 그것들이 유용하다는 환상과 우상화가 점점 강력해 지고 있다고 봅니다. 경제라는 무한 경쟁이 얼마나 갈지,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요? 일상적인 이야기로 눈을 돌려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비닐 하나는 분해가 되더라도 수십만 개의 입자로 지상에 남겨진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입자들이 공기로 돌아다니다 우리 몸에 들어오고 또 먹이사슬로 인해 축적됩니다. 육체적으로 오염된 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나 오래 견뎌낼 수 있을지, 자문해 봅니다. 불교적 가치를 품고 있지 않으면 관성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환경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게 불자로서의 태도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제 경험을 간단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1989~2001년 독일 함부르크에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1989년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독일에서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불교는 환경이나 비폭력, 소수자 등 다양한 경로로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인지하기 시작했지요. 대학에 학생들이 이용하는 값싼 식당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거기에 모든 1회용품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컵과 그릇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1회용품 사용않기’ 운동은 젊은 학생들에 의해 실천되면서 곧 대학가로 그리고 독일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자발적인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보호라는 큰 문제도 결국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나를 죽이면 다른 것도 죽는다는 것은 이치입니다. 청정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전기자동차. 그럼 전기는 공짜로 생기는 것일까요? 인간들은 무제한적인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사는 게 아닙니다. 제한된, 한계가 있는 곳에서 다른 것을 희생시키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성하면서 소유욕을 제한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과 우상화는 곧 위기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 안에 젖어 들고 자식들에게까지 넘어갑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물욕과 재물에 대한 탐욕은 전 세계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시장 우상화를 떠나 공동체 가치를 지향하는 정신적 목표를 다시금 확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의식 자체가 오염돼 있으므로 그것을 단박에 자를 수 없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에 의지해 조금씩 배워나간다면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화 이야기를 해봅시다.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오직 누더기 한 벌, 마침 도시에 붓다께서 설법하러 오신다는데 가난한 부부는 보시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가진 누더기를 팔아 촛불을 하나 사서 붓다에게 올렸습니다. 설법이 끝나고 다른 촛불은 꺼졌는데 그 촛불만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 제자가 불을 끄려 했지만 꺼지지 않자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올린 촛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촛불을 올린 사람은 한 겁에 걸친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행을 북돋아 주기 위한 붓다의 과장 섞인 화답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업에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지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초기불경에서는 보살이 아닌 미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 전생에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 보살이 나옵니다. 과거에 헌신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희생을 행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현생에서 얼마나 큰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 보여줄 때 보살이 나옵니다.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실 당시 불교는 상당히 발전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성공적인 포교사였지요.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불자들은 석가모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가 열반해 무위 속 행복한 상태에 있다는 그 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죠. 고통 받는 중생들을 버리고 혼자만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탑을 세웁니다. 석가모니 사리가 8등분 돼 인도 전역에 퍼졌는데 탑에 사리를 봉안해 진신사리로서 살아계신다는 관념을 갖게 된 것이지요. 존재하는 석가모니는 사라졌지만 가르침은 남았다는 것이 대승불교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타카 본생담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본생담은 매우 단순하지만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문헌입니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자발적인 헌신으로 타인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현상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살행의 출발점인 자타카에서 전생으로 언급된 보살은 모든 수행자에게 적용됩니다. 자타카의 첫 번째 이야기는 수메다와 연등불의 만남입니다. 수메다가 진흙 위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덮어 연등불의 발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죠. 연등불은 수메다에게 훗날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며 수계를 줍니다. 이 수계는 수메다가 발심하고 수없이 많은 공덕을 쌓아 나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시위왕과 비둘기 이야기입니다. 왕이 산책하러 나갔을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매를 피해 왕의 가슴으로 숨어들어옵니다. 생명체를 보호하겠다는 원을 세운 왕은 그 원으로 비둘기를 보호하려 하죠. 그런데 매가 그 모습에 항의합니다.

“왕의 마음은 고결하지만 저는 비둘기를 잡아야 새끼를 키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끼들은 굶어 죽어가는 데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 말에 왕은 매에게 비둘기만큼의 보상을 해주겠다며 자신의 엉덩잇살을 잘라 줍니다. 하지만 저울 위에 아무리 살을 떼어 올려도 균형이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왕이 저울 위로 올라가자 균형이 맞게 됩니다. 불교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의 평등성을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보살행을 하겠다고 서원하는 동안 역설적인 상황이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실패는 있을 수 있고 운이 좋아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불교는 이를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타카는 이 상태에서 대승을 실현하는 불교적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완전성에 대한 열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도 노력하면 저런 위대한 인격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누구나 노력한다면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불자들은 종교적 열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의 완성인 붓다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요? 붓다만이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아라한은 자기 자신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고통 받는 중생을 구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것입니다. 가르침을 베풀고, 스스로 무상함을 알고, 그 경험을 통해 마음을 돌려 보살행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나아갈 때 구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가엽다고 해서 붓다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붓다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그것이 구도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고 시작한다면 우리는 더욱 타인에 대한 연민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연민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고귀하게 만듭니다. 사회적으로 타인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갖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불연을 통해 뭔가 변하게 된다면 더 큰 에너지로 사회가 불국토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대승불교도를 ‘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보살행입니다.

정리=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이 강의는 3월17일 서울 종로 한국불교연구원 법당에서 진행된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보살사상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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