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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동헤라클레스와 괘릉의 금강역사

기자명 주수완

힘의 상징 헤라클레스, 인도 중국 거쳐 신라서 금강역사로 환생

▲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금동 헤라클레스 입상. 기원전 2세기경. 높이 2.41m.

카피톨리노 박물관에는 아우렐리우스 청동기마상 외에 또 다른 걸작의 대형 청동상이 전시되고 있다. 높이 2.41m의 이 상은 헤라클레스를 표현한 것인데 크기도 크기이지만, 아직도 금빛 도금이 찬연하게 남아있어 금세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마치 불상을 보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불교미술의 용어로 말하자면 금동헤라클레스입상인 셈이다. 이 청동상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몽둥이를 오른손에 들고 있고, 왼손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사과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다. 몽둥이와 사과는 그에게 주어졌던 12개의 난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그가 힘과 지혜로 그 힘든 일들을 모두 해결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중에서 몽둥이는 첫 번째 과제였던 네메아의 사자와 싸울 때와 두 번째 과제인 히드라를 죽일 때 사용한 헤라클레스의 주요 무기였다. 한편 사과는 11번째로 주어졌던 히스페리데스 정원의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과제를 해결한 결과물인데, 이는 그 과정에서 천벌을 받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구해주기도 하고, 결국에는 아틀라스를 지혜로서 속여 황금사과를 구해오게 되어 헤라클레스가 단순히 힘만 장사였던 것이 아니라 매우 지혜로운 인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카피톨리노 박물관 소장
청동의 헤라클레스입상
지금도 금빛 도금이 찬란

BC 4세기 알렉산더 시절
라시포스의 원작 모사한
BC 2세기 작품으로 추정

헤라클레스 후손 주장한
알렉산더의 모습도 투영

알렉산더 동방원정 따라
그리스의 헤라클레스가
인도서 금강역사로 변화

사찰마다 금강문을 짓고
수호신 금강역사로 모셔
왕릉 무인상으로도 변신

이 청동상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총애를 받던 궁정조각가 리시포스(Lysippos, B.C.370~310경 활동)의 원작을 모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리시포스의 조각 특징은 독특한 비례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헤라클레스의 비례를 보면 머리가 신체에 비해 다소 작고 그로인해 더 넓어 보이는 어깨와 그 어깨너비만큼 굵은 단단한 허리, 더불어 특이하게 강조된 골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리시포스는 고전기 조각의 대가 페이디아스의 뒤를 이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였고, 후대에 그를 모방하는 조각가들이 많아 대체로 리시포스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후대에 흔히 팔등신이라고 하는 모범적인 인체의 비례도 이 리시포스가 확립한 인체 비례에 기인한 것인데, 그래서 머리가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것인가 보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근육과 자세 등이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틀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헤라클레스라는 힘을 상징하는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이러한 다소 경직된 모습이 더욱 이 상을 강건한 이미지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언뜻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인체를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는 규율(이를 ‘카논’이라고 한다)을 통해 이 인물이 단순한 힘센 사람이 아니라 신화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바티칸 박물관 소장 금동 헤라클레스. 기원후 1~3세기.

한편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헤라클레스 청동상과 거의 유사한 모습의 금동헤라클레스 청동상이 바티칸 박물관에 한 점 더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연대를 조금 내려 보는 편인데 대략 1~3세기경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도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헤라클레스와 마찬가지로 리시포스의 원작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왼손 팔뚝에 사자가죽을 걸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네메아의 사자를 잡은 다음 그 가죽을 벗겨 이후 몸에 두르고 다녔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징적인 사자가죽이 카피톨리노 박물관 청동상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혹 이 상은 팔뚝에 별도로 만든 진짜 가죽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헤라클레스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상으로 묘사되는 것에 반해 이들 리시포스 양식의 헤라클레스 상들은 수염이 없는 앳된 소년의 얼굴로 묘사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추정컨대 이는 리시포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전속 조각가였던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알렉산더는 스스로를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마치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처럼 자신도 사자 가죽을 쓴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초상을 헤라클레스처럼 묘사했다면 반면 리시포스는 이 헤라클레스 청동상들에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투영시킴으로써 알렉산더와 헤라클레스가 서로 같은 인물임을 더욱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여하간 우람한 장년층의 인체에 소년 같은 앳된 얼굴은 서로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헤라클레스가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장사였음을 보여주는 듯하여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 출가한 석가모니를 밀착 경호하고 있는 금강역사. 헤라클레스 도상에서 채용된 모습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기원후 2세기경.

그런데 이 헤라클레스는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의 과정에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인도까지 진출하면서 헬레니즘 미술이 인도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 때 다양한 그리스 미술과 함께 이 헤라클레스 도상이 인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헤라클레스가 석가모니를 모시는 금강역사로 채용된 점이다. 그가 힘의 상징이었으니 석가모니의 보디가드로서 채용된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불교미술을 처음 만들었던 간다라의 장인들이 그저 힘센 인물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경전에서도 굳이 강조되지 않는 금강역사를 불교미술에서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신화적으로 그가 했던 영웅적인 행위들이 보디가드로 채용되는데 스펙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예를 들어 그가 황금사과를 구하러 가는 길에 프로메테우스를 구한 사건도 크게 참작이 되었을 것 같다. 당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벌로 제우스에 의해 카프카스 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데,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그의 간은 계속해서 다시 살아나고 그때마다 다시 쪼아먹히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를 구해준 것이 헤라클레스였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 즉 ‘미리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라는 의미의 이름은 마치 지혜의 전달자로서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들을 의미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것은 석가모니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때문에 선지자를 구해준 경력이 있는 역사(力士)라는 측면에서 석가모니의 보디가드로서 동양에서 재취업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더구나 그가 해결했던 12가지의 난제는 마치 석가모니께서 깨달으신 12연기와도 묘하게 분위기가 겹쳐진다. 석가모니 사후 그 분의 깨달음의 요체였던 ‘12연기를 지키는 자’라는 이미지라고나 할까.

불교의 전래와 함께 금강역사의 도상도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헤라클레스도 먼 동방의 나라 신라의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미 중국을 통해서 전해지는 동안 상당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인도미술에 나타나는 헤라클레스의 원형을 지닌 금강역사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의 능으로 생각되는 괘릉을 지키는 석인상 중에서 헤라클레스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바티칸이나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헤라클레스처럼 수염이 없는 앳된 모습의 헤라클레스는 아니지만, 한 손으로는 몽둥이를 짚고 선 것처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엇인가를 움켜쥔 듯한 자세는 두 금동헤라클레스의 자세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상. 기원후 8세기초 무렵.

특히 몽둥이도 그냥 몽둥이가 아니라 야구방망이처럼 생겼는데 그 위에 돌기가 달린 듯한 모습은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깊은 인연의 끈이 느껴진다. 전설 속의 도깨비 방망이도 혹 이 헤라클레스의 몽둥이에서 온 것일까?

또한 괘릉 석인상은 머리에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데, 불끈 동여맨 끈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마치 곱슬곱슬하게 만든 레게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유독 이렇게 머리 모양에 신경 쓴 것은 리시포스의 헤라클레스의 헤어스타일과 상당히 닮았다. 자세히 보면 헤라클레스 역시 얇은 끈으로 머리를 동여맨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동·서양의 두 장사들이 머리 매무새는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은 공통된 캐릭터였던 것 같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처럼 왕릉을 장식하는 헤라클레스는 불교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만큼 사찰의 금강역사로서도 많이 만들어졌을 것 같다.

▲ 괘릉 무인석상과 카피톨리노 박물관 헤라클레스상의 머리모양 비교. 머리를 동여맨 띠와 곱슬한 머리카락에 유독 신경을 쓴 모습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 리시포스에 의해 제작된 팔등신의 헤라클레스 상은 로마시대에 이르러 헤라클레스가 여전히 인기 있는 신으로 추앙되면서 헤라클레스 신전에 봉안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제 그 신은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도 사찰마다 금강문을 세우고 그를 봉안하고 있어 새로운 그만의 신전을 얻은 셈이니,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이 땅에 정착한 것이라 하겠다.

동서양의 이야기를 연결해보면 이렇다. 여신 헤라의 계략에 걸려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죽인 헤라클레스는 번뇌에 빠져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12개의 난제를 해결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풀 답을 얻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하고 지혜를 얻어 문제를 모두 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비극적으로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번뇌를 끊기 위해 인도에 환생했고 이번에는 또 다른 스승 석가모니를 모시며 지혜를 구하는데 석가모니는 그에게 12개의 난제 대신 12연기를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해서 힘과 지혜를 거머쥔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없었던 한 가지, ‘평화’를 그의 신전 금강문에서 비로소 얻었던 것이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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