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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선암 스님

내 앵글에 ‘청련<靑蓮> 법음’ 담아야 영상전법 완벽 회향

▲ 선암 스님은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생명이기에 촬영 전과 후의 연꽃은 분명 다르다”고 말했다.

박종대 시인이 물은 적 있다.

‘넓죽한 잎 펼쳐 놓고/ 어서 오게/ 하시는데// 연꽃 말씀 받아 오실/ 그런 분/ 안 계신가//저 위에/ 사뿐/ 올라앉을/ 이슬방울 같은 사람’ (박종대 시 ‘연못가에서’ 전문)

외할머니 손잡고 동진출가
공군 정훈감실서 현상작업
군 제대 후 카메라 첫 구입

일본 사진잡지 보며 독학
청정명료 선적구도 완성 후
연꽃·영산재 순간포착 46년

연당·연지가 곧 영산회상
경쟁·갈등 휘말린 도시 사람
‘처염상정’ 연꽃 품어야 치유

시인이 고대하던 ‘연꽃 말씀 받아오신 분’ 있다.

한여름 새벽 연못가에 하염없이 앉았더랬다. 홍련은 아직 묵언 수행 중이고 가부좌 튼 백련은 ‘하얀 선정’에 들어 있다.

여명이 트일즈음 카메라를 챙겨 일어선다. 깊은 침묵에서 깨어 난 연꽃의 숨소리 들으려 신발을 벗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 몸을 낮춘다. 지평선에 근접한 해는 영롱한 빛을 연못에 뿌렸고, 꽃은 그 빛을 자신의 몸속으로 투영시켰다. 순간, 붉은 꽃은 깨달음을 얻은 듯 등(燈)처럼 반짝였고, 그 뒤의 넓은 잎은 꽃의 오도(悟道)를 증명이라도 하듯 초록 광배로 나툰다.

‘붉은 깨달음, 초록 광배!’

찰칵!

성성(惺惺)한 셔터 소리, 그 즉시 밀려온 적적(寂寂). 나와 우주가 생동하고 있다는 사실 확인은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여, 부처님과 염화미소를 주고받은 가섭, 중국 선의 초조 달마가 들어앉을 틈은 없다.

▲ ‘붉은 깨달음 초록 광배’로 다가온다.

서울 신촌 봉원사 선암(禪岩) 스님. 한 여름에 피워 낸 연꽃 설법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온 지 46년이다. 영산재, 출가, 다비 현장의 순간도 포착해 왔지만 연꽃은커녕 연못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에 연꽃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던 선암 스님은 연꽃사진에 관한한 독보적 존재다.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 봉원사 운파(雲波) 스님에게 동진출가 했다.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까까 중”이라는 놀림을 받았는데 가끔 맞기도 했단다. 그 놀림, 그 주먹에 맞서지 않았던 건 나름 스님인데 친구들 멱살 잡고 땅 바닥에 뒹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고 그런 놀림 계속 당할 수만은 없는 일. 글러브 끼고 체육관 링에 올랐다. ‘권투 연마’ 소문이 신촌 일대에 퍼져가자 놀림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6개월 뒤 글러브를 벗었다.

군에 입대해야 할 즈음 은사 운파 스님이 이르셨다.

“육군은 월남전의 한 복판에 설 수도 있다. 가능하면 피해라!”

‘살생하지 말라’는 스승의 뜻을 헤아린 선암 스님은 1967년 국·영·수 시험까지 치르며 24대1의 경쟁률을 뚫고 공군에 입대했다. 마침, 대방동 공군본부 헌병대 면회실에서 근무했는데 옆 사무실이 공군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정훈감실(政訓監室)이었다. 우연찮게 한 번 들렀는데 장교들의 배려로 생전 처음 암실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작은 필름 하나가 현상·인화 과정을 거쳐 사진으로 탄생되는 광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과거의 한 순간을 영원의 순간으로 바꿔놓는 사진 세계에 흠뻑 빠져든 선암 스님은 그 이후 틈만 나면 암실을 들락거리며 현상 일을 도왔다.

1970년 제대 직후 봉원사 일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큰스님들의 잔심부름부터 목재와 기왓장 나르는 일까지 마다 않고 힘을 다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용돈을 모아 청계천 상가에서 야시카(Yashica) 카메라 한 대를 샀다. 형편을 고려해서 흑백 필름을 선택했다. 산꼭대기 올라가 마을을 담고, 들판으로 나가 이름 모를 야생화를 찍고, 종로 거리를 활보하며 도시 풍경도 촬영했다. 카메라만 있으면 세상을 움켜쥔 듯했다.
한 1년쯤 되었을까? 한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스님이다. 부처님 말씀을 담아야 한다!’

▲ ‘하얀 선정’에 든 백련.

연꽃에 포커스를 맞췄다.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몇 종 안 되는 한정된 연꽃만으로는 사진가 반열에 오를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1972년 월간 잡지 ‘불교’ 기자를 자청했다. 꽃과 잎이 빚어내는 천연 색감을 표현하려 칼라 필름으로 바꿨다. 선암 스님의 영상전법(映像傳法)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20년 후 1992년 동방프라자 미술관에서 연꽃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아마도 한국 최초의 ‘연꽃 사진전’이었을 것이다.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한 찰나 일 존재’ 설을 확신이라도 하듯 꽃 한 송이에 완벽히 집중한 작품들이다. ‘이 세상에 연꽃 홀로 존귀하다’는 사자후가 들릴 정도다. 하여, 사진은 간결하고 선명하기에 보는 순간 환희심이 인다. 확, 와 닿는 사진이지만 이건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이 아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게 아니라 반대로 가슴 깊숙이 내재돼 있던 청정심을 솟구쳐 올리기 때문이다. 선암 스님만의 독특한 선적 매력이 배인 청정명료(淸淨明瞭)한 전시작품 52점은 모두 인연을 맺어 사람들 품에 안겼다.

선암 스님은 7살 때 외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 들어섰던 한옥에 머물고 있다. 봉원사 사하촌에 자리한 고택 대문에는 우직하게 쓴 ‘선암소림(禪巖小林)’ 편액이 걸려 있다. 묵담 스님이 이곳에 이틀간 머문 후 선암(禪岩) 스님을 위해 붓을 들었다고 한다.

사진을 전공 하지 않은 선암 스님은 어떻게 한국 대표 사진가 명단에 당당하게 법명을 올렸을까? 대청마루를 지나 뜰로 나간 선암 스님은 잡지 몇 권을 들고 다탁 앞에 다시 앉았다. 일본에서 월간으로 발행되는 사진 전문 잡지 ‘포토콘테스트’다.

“처음에는 보이는 대로, 느낌대로 연꽃을 촬영했는데 현상해 놓고 보면 그 사진이 그 사진인 듯했습니다.”

허공 속 뜬 구름 잡는 식으로는 안 될 일임을 직감한 선암 스님은 연지(蓮池)가 아닌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혹 출판되는 사진집을 들여다보며 연구해 가던 중 지인의 소개로 일본 잡지에까지 닿았다. 그 잡지서 뭔가 알아차렸다.

“잡지에서 멋진 구도로 찍힌 사진을 보면 그 즉시 복사해서 주머니에 넣고는 밖으로 나가 유사한 환경을 찾아내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 600mm 망원 렌즈로 환상적인 연꽃을 담아냈다.

모방의 셔터 수가 늘어날수록 사진은 창조적 변화를 보이며 작품으로 승화됐다. 우선 아웃 포커스 기술을 이용해 연꽃의 뒤 배경을 깔끔하게 정리해 갔다. 대신 이슬 한 방울, 꽃 가장자리에 스친 빛 한 줄기도 놓치지 않았다. 프레임에서 덜어내고 비워내자 고농도로 응축된 단순명료한 사진이 완성됐다.

“이 꽃, 저 잎, 다 담으려 할수록 사진은 망가집니다. 홍련과 백련이 주는 색감에 마음을 뺏긴 순간 정작 멋지게 펴진 초록의 잎을 잃고 말지요. 연꽃의 모양에만 눈이 꽂히면 잎의 가장자리를 스쳐가는 오묘한 빛을 놓치고 맙니다. 렌즈가 아닌 직관에 포착된 피사체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불필요한 사물이 보이면 가차 없이 밀어 내고 꼭 필요한 것만 앵글 앞으로 당겨 와야 합니다.”

1970년대는 물론 80년대까지도 사찰에서조차 연꽃을 구경하기 어려워 진천, 삼척, 함양, 익산 등 전국으로 동분서주해야 했다. 백련이 자란다는 말 한마디에 목포까지 한 달음에 달려간 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금당면의 한 고택 연못에서 하얀 자태를 담을 수 있었는데 선암 스님의 첫 백련사진으로 기록됐다. 익산 홍련암만 해도 줄기차게 10년을 다니고서야 몇 점의 작품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 궁금했다. 동일 공간에서 피는 연꽃을 10년씩 찾을 이유가 있을까?

“마음에 탁 와 닿는 연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파문이 크게 일면 연꽃도 흔들려 초점을 맞출 수 없기에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내일은 맑을 것 같아 포기하고 다시 찾아가 보면 이미 어제의 연꽃이 아닙니다. 다소 비약적으로 말하면 촬영 전과 후의 연꽃이 다릅니다.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1초 사이에 16찰나가 지나간다고 한다. 찰나와 찰나 사이에 생멸이 있고, 성주괴공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찰나와 찰나 사이에 존재하는 피사체를 낚아채는 예술에서 직관(直觀)은 필수일 터다.

“사진작가의 직관은 경험에서 우러나옵니다. 산을 담는 작가가 긴 세월 동안 산을 올라야 하듯, 꽃을 담는 작가는 오랜 시간 꽃들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부여 궁남지, 시흥 감곡지, 익산 홍련암 연지에 가시면 아름다운 연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대할 때 청정한 연꽃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선암 스님의 연꽃 사랑은 정평이 나 있다. 사찰 주지스님이나 지자체장들을 만날 때마다 “연못에 연(蓮)이 없으면 그게 어디 연못”이냐는 일침을 마다 않는다. 서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봉원사 연꽃축제 또한 선암 스님이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2000년부터 3년에 걸쳐 손수 연을 키워본 선암 스님은 2003년 150개의 연꽃 화분으로 축제를 열었고, 올해 8월3일 열리는 ‘16회 봉원사 연꽃 축제’는 600여개의 연꽃화분으로 장엄된다. 중국, 일본, 미얀마, 캄보디아,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 등 지구촌의 다양한 연꽃도 선암 스님의 사진창고에 보관돼 있다. 이 모든 건 열정을 넘어 원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50년 가까이 들은 연꽃 설법의 정수를 여쭈어 보았다.

“처염상정(處染常淨)입니다. 어부들이 쓰는 가슴장화 신고 연못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냄새가 정말이지 지독합니다. 그 순간 붉게 핀 연꽃 한 번 스윽 보면 미소가 절로 번집니다. 연의 씨앗은 천년이 지나도 심으면 싹을 틔워 해탈의 꽃을 피워내기에 불성(佛性)을 상징합니다. 연의 씨앗 같은 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혼탁한 도시 속에서도 맑은 마음을 내며 진한 향을 피워낼 것입니다. 경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도시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은 연꽃을 가까이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외수 작가의 시 한 편이 스쳐간다.

‘흐린 세상을 욕하지 마라// 진흙탕에 온 가슴을/ 적시면서/ 대낮에도 밝아 있는/ 저 등불 하나’ (이외수 시 ‘연꽃’ 전문)

선암 스님은 한 동안 연꽃 전시회를 갖지 않았다. 이제 연꽃을 향한 카메라는 내려놓은 것일까?

“아닙니다. 2년 전에도 캄보디아 연꽃을 담았습니다. 태고종 봉원사는 6·25 한국전쟁 참전국을 차례로 방문해 영산재를 봉행해 오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물이 말라 모래 바닥을 보인 연못에 연꽃이 피었다고 해서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연꽃 열정만은 아직 남아 있음이다. 그런데 이내 혼잣말 하듯 토로했다.

“저는 아직 청련(靑蓮)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경전에 분명하게 등장하는 꽃입니다.”

‘불소행찬(佛所行讚)’에 따르면 부처님 탄생 때 하늘도 꽃비를 내렸는데 그 꽃비 속에는 백단향 머금은 청련과 홍련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수소문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청련을 보았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씨앗주머니가 없는 수련을 말하는 건 아니다.

“존재만 한다면, 제 앵글에 꼭 담아 사람들에게 전할 것입니다!”

선암 스님에게 연당(蓮塘)·연지(蓮池)는 곧 영산회상(靈山會相)이다. 그곳서 피어오를 푸른 법설을 기다려 보자! 청련이 드러내는 ‘푸른 깨달음’이 보고 싶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선암 스님

· 1947년 출생.
· 1964년 운파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 1988년 일본 아사이신문 제50회 국제사진 공모전 BEST 선정.
· 2004년 한국관광공사 공모전 대상.(대통령상)
· 사진집으로는 ‘연(蓮)’, ‘영산재’, ‘출가’, ‘부처의 미소’ 등이 있으며 2018년까지 열일곱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 현재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보존회 고문을 맡고 있다.

 

[1437호 / 2018년 4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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