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담불라황금석굴사원
7. 담불라황금석굴사원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04.3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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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탈환 14년 전쟁 버텨낸 구국의 바위산에 왕이 조성한 석굴사원

▲ 타밀족과의 14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바라감바후 1세는 왕좌에 복귀한 후 거대한 석굴사원을 조성했다. 석굴 안에는 56개의 불상과 함께 부처님 생애, 싱할라왕국 역사를 담은 벽화도 그려졌다. 다섯 개의 석굴이 남아있는 담불라황금석굴사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2번 석굴.

대신들은 한밤중 은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국왕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이미 담불라 바위산의 석굴로 몸을 숨겼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대신들은 적장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담판을 지으려함인가. 아니다. 투항하기 위해서였다. 날이 저물고 어두운 밤길에 발이 묶인 대신들은 인근 사찰에 하룻밤 잠자리를 의탁했다. 한밤중에 찾아온 대신들의 행보가 미심쩍었던 스님이 연유를 물었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마하팃사 스님의 물음에 대신들은 자초지종을 말했다. ‘성격이 급한 국왕’에 대한 불만도 함께 털어놓았다. 대신들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마하팃사 스님이 입을 열었다.

바라감바후 등극 1년 만에
타밀 침략으로 수도 뺏기고
스님들 도움으로 14년 은신
천혜 요새서 게릴라전 펼쳐

수도 찾은 후 감사 표시로
인공 석굴 조성해 중창불사
네덜란드 침략 때 석굴 조성
호국불교 상징으로 여겨져


“이민족, 이교도의 침입을 받아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왕과 대신들이 갈등을 빚어서는 안 됩니다. 싱할라왕과 타밀왕 가운데 누가 붓다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법등을 후대에까지 전하겠습니까.”

마하팃사 스님의 일침에 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스님은 담불라석굴에 몸을 숨기고 있는 국왕을 찾아가 왕과 대신들을 화해시켰다. 대신들과 협력해 전열을 가다듬은 국왕은 타밀족과의 전쟁에 박차를 가했다. 석굴을 요새삼아 적군의 약점을 노리는 게릴라전이었다. 전쟁은 무려 14년이나 계속됐다. 마침내 기원전 89년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탈환했다. 왕좌에 복귀한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이때부터 바라감바후 1세로 불렸다.

▲ 담불라황금석굴사원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이다.

아누라다푸라 남쪽으로 72km 떨어져 있는 담불라석굴은 타밀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천혜의 요새이자 든든한 은신처였다. 수도를 되찾고 왕좌에 복귀한 후 바라감바후는 14년간 머물렀던 담불라석굴을 대대적으로 중창했다. 스님들의 수행처로 이용되던 자연 석굴 옆으로 크게 인공 석굴을 굴착하고 불상을 조성했다. 후대인들은 바라감바후의 은신처였던 석굴에 1번, 이후 조성된 석굴에 2번이라 번호를 붙였다. 이후로도 새롭게 석굴이 조성될 때마다 번호를 붙였다. 현재 담불라에는 다섯 개의 석굴이 조성돼 있다. 그 가운데 바라감바후가 조성한 2번 석굴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수복전쟁의 근거지가 되었던 담불라와 그곳 스님들에 대한 감사의 크기가 석굴조성에 투영된 결과다.

2번 석굴은 바라감바후가 조성했다는 의미에서 ‘마하라자위하라’ 즉 ‘위대한 왕의 사원’으로 불린다. 폭 52m, 깊이 23m에 달한다. 석굴 입구의 높이도 무려 6m다. 석굴 안에는 16개의 입불상, 40개의 좌불상이 조성돼 있다. 입구에는 이 석굴을 조성한 바라감바후 1세의 입상도 있다. 석굴 내부는 극채색의 벽화로 장엄돼 있다. 조성 이후 개보수를 거치며 벽화가 더해졌을 것이다.

부처님생애는 석굴 천장에 집중돼 있다. 카필라성을 나온 싯다르타태자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방해하기 위해 마왕 마라가 무기를 들고 위협하거나 세 딸을 보내 유혹하는 모습 등은 한눈에 보아도 어떤 순간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

▲ 2번 석굴 천장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빈틈없이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싱할라왕국의 역사적인 순간들도 기록돼 있다. 불치가 스리랑카로 이운되는 과정, 마힌다 스님의 전법, 보리수가 전해지는 과정 등이다. 그 가운데에는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창끝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고 타밀족 엘랄라왕과 맞서 싸웠던 둣타가마니왕의 전쟁은 엘랄라의 가슴에 창이 꽂히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다. 타밀을 물리친 역사를 상기시키기 위함일까. 바라감바후는 위대했던 선조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타밀족을 물리치고 왕국을 수호했음을 조상에게, 그리고 후대에 알리고 싶었나 보다.

석굴 안 한가운데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는 돌항아리가 놓여있다.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석굴을 조성하기 전부터 계속 흘러나왔다고 한다. 한 번도 끊긴 적 없던 이 물 덕분에 바라감바후는 이곳에 무려 14년간이나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돌항아리에 모아진 물은 사원의 중요한 의식 때 불전에 올리는 청수로 사용된다. 보통 때에는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러니 항아리 밖으로 물이 넘쳐야 한다. 하지만 넘친 적이 없다. 이 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이유다. 이곳 지명 ‘담불라’ 역시 물이 솟아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신비로운 물이 석굴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석굴 안에는 불상 외에도 다양한 신상들이 조성돼 있다. 부처님 뒤로는 힌두교의 신상인 우팔만(비쉬누신의 화신), 사만(스리랑카의 토속신) 상도 조성돼 있다.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과 전쟁을 벌였지만 종교는 민중들의 삶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오고 있다.

2석굴 조성당시의 모습은 지금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12세기 스리랑카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왕 니상카말라가 석굴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왕은 막대한 양의 금을 보시해 석굴 전체를 금으로 칠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금을 뜻하는 ‘랑기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여져 ‘랑기리담불라’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지금도 담불라황금석굴사원으로 불린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금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전쟁과 외세의 지배를 거치며 대부분의 금은 약탈당하거나 사라졌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금이 사라진 자리에 정성껏 채색을 했다. 지금 남아있는 벽화와 불상의 채색은 상처를 덮고 있는 치유의 흔적이다.

▲ 2번 석굴을 조성한 바라감바후 1세의 입상.

석굴사원을 금으로 채색은 니상카말라왕은 석굴 안에 자신의 흔적도 살짝 남겼다. 석굴 안 오른쪽 모퉁이에 자신의 조각상을 조성했다.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을 순례하고 스리파다에 보시금을 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불사를 후원했는지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흔적은 싱할라왕조의 두 번째 수도 폴로나루와에서 선명하게 만나볼 수 있다.

2번 석굴에 비하면 규모가 현저히 작지만 1,3,4,5번 석굴도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거대한 열반상이 조성돼 있는 1번 석굴은 바라감바후 1세가 은신해 있던 당시부터 스님들이 사용하던 석굴이다. 안에는 거대한 열반상이 조성돼 있다. 이 열반상은 스리랑카 민간 신앙에 등장하는 비쉬누신의 화신 ‘데바라자레나’가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적으로는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발치에 조성돼 있는 아난존자상의 슬퍼하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3번 석굴은 네덜란드의 침략기였던 1780년에 완성됐다. 키르티스리라자싱하(1747~1782)왕은 불교를 구심점 삼아 외세를 몰아내고자 다시 한 번 석굴 조성불사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넓이 27.4m, 깊이는 24.5m, 최대 높이 11m에 달하는 제법 큰 석굴이 조성됐다. 담불라 다섯 개의 석굴 중에 두 번째로 큰 규모다. 내부에는 19m의 와불상도 조성돼 있다. 비록 외세를 몰아내는 데에 실패했지만 이 시기 불교는 잠시나마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4번 석굴에는 바라감바후의 왕비 소마와티가 보시한 보석들이 봉안돼 있던 석탑이 남아있다. 1980년대 석탑이 도굴당하는 일이 벌어져 보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사리가 출토되기도 했다.

5번 석굴은 언제 누가 조성했는지 등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벽에 남은 기록으로 1915년 한 스님에 의해 보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힌두교의 신 비슈누와 전쟁의 신 스칸다, 그리고 지역 토착신인 데바타반다라 상이 함께 조성돼 있다는 점이다.

담불라 다섯 개의 석굴사원에는 모두 157개의 불상과 보살상이 조성돼 있고 내부의 천장과 벽에 남아있는 채색 면적은 약 2050㎡(620평)에 달한다. 덕분에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둣타가마니왕에 이어 다시 한 번 타밀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바라감바후의 요새로써 타밀족과의 전쟁을 승리리로 이끌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던 담불라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고려사에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강화도와 팔만대장경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잠깐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대신들의 말처럼 바라감바후는 대신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을 만큼 성격이 급한 왕이었을까?

역사를 살펴보면 바라감바후는 그리 행복한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등극한지 불과 1년 만에 내란에 직면해 왕좌를 위협받았다. 곧이어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빼앗기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더욱이 이 시기 스리랑카는 역사서에 기록될 만큼 지독한 가뭄에 시달렸다. 굶어죽는 이들이 부지기수에 달했고 심지어는 죽은 시체를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무엇하나 녹록지 않은 시기, 그가 자비롭고 덕스러운 왕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들이 왕을 배신하려 했던 이유를 왕의 성격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억울한 처사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38호 / 2018년 5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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