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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봄비가 알리는 소식

기자명 최원형

함께 지속하려면 자연이 주는 귀띔 들을 수 있어야

이른 아침 동네 산에 올랐다. 산 초입에서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고는 며칠 전 내린 비를 떠올렸다. 산이 성큼 다가온 것 같고 산색이 더욱 짙어진 것 같더니 봄비의 작품이었던 게다. 일 년에 고작 몇 번 그것도 여름 장마 이후에나 있음직한 풍경을 봄에 만나게 될 줄이야. 평소엔 크고 작은 바위만이 뒹굴던 계곡 군데군데에 작은 폭포를 이룬 곳이 꽤 됐다. 설악산 비룡폭포가 부럽지 않았다. 올 봄엔 예년에 비해 비 소식이 잦다. 충분치 않다 해도 어느 정도 가뭄 해갈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뿌옇던 대기를 말끔하게 닦아주기에 비 소식은 희소식이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해마다 봄이면 가뭄을 걱정해야 했다. 계곡 물이 마르니 산중 암자에서도 급기야 물이 부족해져 공수해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던 터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가져다 쓸 물이라도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수도꼭지 틀면 물 나오는 도시
가뭄 때문에 불편 겪는 일 없어
자원 한정됐지만 편의 위해 남용
순환법칙 역행하면 지속성 퇴보

숲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물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날이 가물어 숲 바닥까지 마르니 바닥에 사는 애벌레나 지렁이가 귀해지고 그걸 먹이로 삼는 호랑지빠귀는 새끼 새를 기르는 기간이 늘어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육추가 불가능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디 호랑지빠귀뿐일까? 모든 생물들에게 비는 생명수다. 민물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비’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에게 비가 생명수라는 걸 체감하는 일은 점점 멀어지게 된 것 같다.

비가 안 오면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면 되고 쓰고 오염된 물을 다시 정수해 쓰면 된다. 비가 아무리 안 내려도 도시에서 가뭄 때문에 불편을 겪는 일은 거의 없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언제든 물이 콸콸 쏟아지니 자연의 변화에 점점 무뎌져 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일이나 정수를 하는 데에는 모두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소비하는 에너지 또한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지구에서 꺼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의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해 살던 과거와 달리 모든 것이 기술에 기반한 삶을 살면서부터 자연의 이치를 자꾸 잊는다. 자연의 이치를 잊는다는 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잊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존재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나 배려가 빠져버린 채 살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가물어 땅이 쩍쩍 갈라지고 저수지 수위가 현저히 낮아지면 그곳에서 살던 생물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그런데 도시에서 느끼는 가뭄의 체감 지수는 고작해야 농산물 가격 인상정도에 그칠 뿐이다. 가뭄이 여타 생명들의 존립자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기 전에 경제적인 면이 먼저 고려가 되니 그 다음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 가깝게 혹은 멀게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러니 뭇 존재들의 안위가 보장이 될 때 더불어 우리의 생존 역시 가능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자명한 이치다. 너무 흔하게 쓰여서 오히려 의미가 퇴색해져버린 말 가운데 ‘지속가능성’이 있다.

이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면 된다는 발상에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기껏 에너지를 써가며 정수한 수돗물조차 믿을 수 없어서, 위생적이어서 또는 편리해서 생수를 즐겨 찾다보니 먹고 나서 버려지는 생수병이 쓰레기문제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우리가 사용한 모든 것들은 모두 반드시 어딘가로 가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분해가 되는 것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순환하게 될 것이고 순환하지 못한 것들은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계속 어딘가에 쌓이게 될 것이다.

봄이 도래하자 너무 더워져 일찍이 꽃망울을 터뜨렸다가 뒤늦게 찾아온 일시적 한파와 폭설에 냉해를 입은 나무는 누구 탓일까? 4월 중순에 대구는 섭씨 30도를 훌쩍 넘기는 기록을 남긴 건 또 누구 혹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날씨가 널뛰듯 예측하기 어렵게 된 것이 결국 우리가 쓰고 버린 것들로 인해 순환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란 걸 자연은 우리에게 귀띔해주고 있다. 늘 공기가 있기에 그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지내다 미세먼지로 탁해지자 새삼 깨끗한 공기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됐다. 되돌리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면 미세먼지 또한 자연의 귀띔일 수 있다.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지속가능이란 결국 존재의 지속가능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더불어 행복까지 바라는 일이 벅차다면 더불어 지속가능할 수만 있어도 참 좋겠다. 비 내리는 풍경이 내 눈을 지나 내 귀에 와 닿자 초목들이 꿀꺽이며 물 마시는 소리로 들린다. 모든 생명의 평화를!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38호 / 2018년 5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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