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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기자명 임석규

우뚝 솟은 5층 석탑, 신라시대 창건 역사 밝혀줄 유일한 단서

▲ 서산 보원사지 전경.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인문지리서 ‘택리지 (擇里志)’에 “충청도에서 내포(內浦)가 가장 좋다”라고 썼으며,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고, 가야산 앞뒤의 열 개 고을을 내포라고 하는데,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해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서울에서 세력 있는 집안치고 여기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도 했다.

중국 문물 백제로 유입됐던
중요 경로 내포지역에 위치

의상 스님 전교 화엄십찰로
백개 암자·천명의 스님 수행

신라말 많은 스님들이 수계
당시 보원사 높은 위상 증거

총 7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주로 고려·조선 유물만 발굴

5층탑이 45도 틀어져 배치
가람배치 달라졌다는 방증

발굴되지 않은 동편에 주목
신라 흔적 찾을 가능성 높아

내포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그곳까지 배가 항해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하며, 지금의 충남 예산·당진·홍성·서산 일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내포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외국의 선진문물이 전래되는 통로역할을 했으며, 고대 불교가 전래되는 중요한 경로이기도 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며 백제 불교를 상징하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의 존재 또한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지나서 용현계곡을 따라 1.2km정도 올라가면 비좁던 계곡길이 갑자기 탁 트이며 넓은 대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통일신라 이전에 창건되었다는 보원사의 옛 터이다. 절터의 넓이는 약 102,886㎡. 주변에 100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1000여명의 승려가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큰 사찰이다.

▲ 서산 보원사지 5층석탑.

1968년 절터 중심부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밭에서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10cm가 채 안 되는 작은 불상이지만 초기 백제불상으로서는 매우 귀한 자료이기 때문에 보원사의 창건연대를 짐작할 때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서산마애삼존불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절터에는 많은 석조문화재가 남아있어서 보원사의 번창했던 시절을 대변해주고 있다. 금당지의 서쪽으로 20m가량 떨어진 곳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스님의 승탑(보물 105호)과 탑비(보물 106호)가 잘 남아 있고 그 앞쪽으로 5층석탑(보물 104호)이 있으며, 개울 건너 쪽으로는 석조(보물 102호)와 당간지주(보물 103호)가 있다. 석조문화재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보원사지 또한 1987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보원사를 크게 중창한 탄문 스님은 고려 초기 광종대에 교단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던 화엄종 승려이다. 고려시대 교종 승려로는 처음으로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불교계를 주도했던 분이다. 탄문 스님은 보원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삼존금불과 석탑을 조성하기도 하였으며, 개경의 귀법사에서 주석하다 만년에 보원사에 내려와 입적하여 승탑과 탑비를 이곳에 남기게 되었다. 보원사는 탄문 스님이 주석하면서 고려 전기의 주요 화엄 사찰로 위세를 떨쳤다.

신라 교학불교를 대표하는 화엄종은 잘 알려져 있듯이 의상(義相) 스님이 중심이 되어 체계를 마련하였고 이후 여러 제자들에 의해 각지에 사원이 건립되는 등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교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의상 스님의 전교활동은 ‘전교십찰’ 곧 ‘화엄십찰(華嚴十刹)’로 상징되는데 십찰이 정확히 어느 사찰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는 ‘해동화엄의 큰 가르침을 편 곳(海東華嚴大學之所)’으로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등과 함께 웅주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를 들고 있다. 특히 ‘고려사’에는 보원사에 고려 1036년(정종 2)까지 영통사, 숭법사, 동화사 등과 함께 계단(戒壇)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되어있다. 계단은 국가에서 정식으로 승려에게 구족계를 내리는 의식이 치러지던 장소이기 때문에 계단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보원사가 교단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탑비(塔碑)가 남아 있어 구체적인 행적이 확인되는 여러 명의 선승(禪僧)들이 이곳 보원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의선사를 계승하여 실제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했던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 스님(體澄, 804~880), 수미산문(須彌山門)을 개창한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 스님(利嚴, 870~936),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 스님(玄暉, 879~941) 등이 가야산 보원사에서 수계한 스님들이다. 이처럼 보원사는 신라말 승려들이 구족계를 받은 여러 사원 중에서 가장 많이 수계했던 대표적인 사원이었다. 승려들은 출가와 활동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서 구족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지만 보원사가 유독 많은 수계 사례를 보이는 것은 신라 말에 그만큼 보원사의 위상이 높았던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서산 보원사지 5층석탑 팔부중상.

보원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하였다. 그리고 2015년에는 백제문화재연구원에서 8차 발굴조사를 시행하였으며 현재도 꾸준히 보존정비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 계획 당시에는 서산마애삼존불이나 1968년 발견된 금동여래입상 같은 삼국시대 유물과 관련된 사찰을 밝혀내어 초창기의 보원사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아쉽게도 삼국시대 사찰은커녕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는 사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소하천을 경계로 오층석탑이 위치한 서편영역과 당간지주, 석조가 있는 동편영역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서편영역에 대한 조사는 오층석탑 서쪽에 일부 노출되어 있던 금당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조선시대 중후반까지 존속한 최종 가람의 주요 시설이 확인되었다. 사역 동편영역에서는 서편영역에 있던 최종 가람의 중심축과는 전혀 다른 중심축을 가진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결과를 종합해보면 보원사지에는 동·서 영역 모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층이 중복되어 있으며, 특히 고려시대 건물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유물 또한 고려~조선시대의 토기 및 기와가 주로 출토되었고, 일부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즉, ‘법장화상전’에 등장하는 해동화엄십찰 중 하나이며, 보조선사 체징 스님이 24세 때(827년) 구족계를 받았던 통일신라시대 보원사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어쩌면 보원사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거대한 5층 석탑이 제공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상·하 이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층 탑신부는 4면에 문비를 조각하였다. 상층기단은 각면 중앙에 기둥을 새겨 2구역으로 나누었는데, 4면을 총 8개로 구획하여 거기에 팔부중상을 부조하였다. 각 존상을 표현한 조각면은 높이 110cm, 폭 73~75cm이다. 하층기단은 각면에 각각 두 개의 기둥을 새겨 3구역으로 나누었는데, 4면을 총 12개로 구획하여 각각에 사자를 배치하였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층기단부에 새겨져 있는 팔부중상의 배치이다.

한국 팔부중상은 현존 작례 대부분이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전기) 석탑기단에 새겨져 있다. 석탑 팔부중상의 구성과 도상적 특징을 정리해 보면, 남면에 건달바상과 아수라상, 서면에 가루라상과 천상(경주계통) 혹은 대어를 메고 있는 상(경주 이외 지역계통), 북면에 마후라가상과 가루라상, 동면에 용상과 야차상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법인국사 보승탑 및 법인국사 보승탑비.

그런데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팔부중상은 이웃하고 있는 각 존상의 순서는 변화가 없지만, 본래 남면에 배치되어야 할 건달바상과 아수라상이 서남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방향을 서남으로 45° 틀어서 배치한 것처럼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석탑의 팔부중상은 전체적으로 서북에서 동남을 가로지르는 축선을 상정한 가람구성에서 필요한 석탑의 부조상으로 볼 수도 있게 된다. 즉, 본래 남면의 건달바상과 아수라상이 모서리에서 90°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탑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이와 같이 상들이 전체적으로 이동된 까닭은 석탑 자체의 축선이 어긋난 것을 맞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즉 석탑이 건립되는 장소가 사찰의 축선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45° 틀어진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암사 수도암(경상북도 김천시)의 약광전과 그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9세기 후반)이 서남으로 45° 틀어져 있는데, 이것도 본당과 그 앞에 세운 석탑 정면을 지형에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팔부중상의 배치를 생각하면 현존하는 오층석탑이 건립된 시기의 보원사지는 현재와는 가람 전체의 축선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고, 석탑이 건립된 위치 또한 지금과는 다른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시굴조사 결과이지만 사역의 동편영역에서 서편과는 중심축이 전혀 다른 건물지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통일신라로 상정되는 청자편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즉 보원사의 창건가람은 동편영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며 동쪽 산비탈 쪽에 더 많은 건물이 조성되었을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산지가람이었으나 이후 점차 평탄지 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동편영역과 산비탈 쪽에 대한 조사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38호 / 2018년 5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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